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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서산의 올레길, 아라메길 1구간의 종점, 해미읍성의 전경

by 柔淡 2010. 5. 25.

향수가든에서 식사를 마치고 해미읍성 주차장에 도착하니 세시 20분이다. 40분동안 뛰듯이 읍성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해미읍성은 해미면 읍내리에 위치해 있으며 성곽길이 1,800m, 높이 5m, 면적 60,000여 평으로 조선조 초기의 대표적인 석성으로

1963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이 성은 충청병마절도사영으로 조선조 태종 18년부터 세종 2년(1420)까지 3년간에 걸쳐 전국각지의 인력을

차출하여 쌓았으며 성종 22년(1491)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성 안에 근무인원은 850여명이나 되는 대부대였으며 충청도의 병권의 지휘소로써 국방은 물론 내란 방지 포호(捕虎)등의 임무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이후부터 왜구의 서해안 침입이 현격하게 줄어서 큰 효과를 보았으나 효종 2년(1651)에 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서 230여년

만에 절도사영으로서의 역할을 끝나고 읍성의 역할이 시작된다.
그 후 이성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을 설치하고 무장이 현감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현감의 임무와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병권을 겸하여

관장하였으며 이순신 장군도 이 성에서 선조 12년(1578)에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

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3,352척이고 높이가 12척에 4개의 문과 여장 688개 및 성벽의 둘레에 3,626척의 해자가 파여지고 적대(敵臺)

18개가 계획되어 2개가 완성되어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당시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있었으며,

석성으로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세군데, 군창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지의 기록에는 읍성의 둘레가 6,630척, 높이 13척, 치성(雉城)이 380첩(堞), 옹성(甕城)이 두 곳, 남문은 3칸이며 홍예(虹霓)를 들었고 2층의

다락을 지었으며 동문, 서문도 3칸이나 북문은 없고 우물이 여섯 군데이며 성밖에 호(壕)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된다. 읍성의 남문은 진남루(鎭南樓), 동문은 잠양루(岑陽縷)라

하였고, 서문은 지성루(枳城樓)라 하며, 북문은 암문형식으로 문루가 없다. 서문의 남측에 인접하여 수구가 성벽 아래로 암거(暗渠)형식으로 마련

되었다.
해자는 성벽에서 8m쯤 간격을 두고 윗너비가 10~11m, 아랫너비 5m, 깊이 1.4~2.4m의 규모로 북벽 쪽에 일부 남아 있다. 남문의 서측으로는 2개의

적대를 가진 치성(雉城)이 길이 7.9~7.7m, 너비 7.5~7.6m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뺴곡이 있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地)가 발견되었다
성은 해발 130m의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마련되고, 성벽은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축조 방법을 보여주는 하대상소(下大上小)의 성석 사용과 쐐기

돌을 많이 끼운 수법을 볼 수 있으며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다.
성(城)의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으므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내포지방에는 천주교 신자가 많았는데 1866년의 병인양요, 1868년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이어 1880년경가지 천주교 박해 때 내포지방의

신도들을 체포 1,000여명의 신도를 이곳에서 처형하였다.
그 때 죄인을 매달고 고문하던 호야나무가 옥사 터 옆에 있으며 죄인을 자리개질 쳐서 죽였던 자리개돌이 서문 밖에 있고 죄인을 생매장하나 터가

여숫골에 있어 천주교 성지로써 해마다 수많은 순례객이 찾아오고 있다.
호서좌영은 이 성에서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1914년까지 250여 년간 지속되었 호서좌영이 폐지되면서 면사무소 초등학교 등 기관, 주택이 있었으나

1970년부터 철거하였고 현재는 정비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1800m길이의 읍성,

 

 정문인 진남문

 

 

 서산시의 모든 관광지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관광계장님이 자신있게 말한다.

실제로 내가 가본 곳 모두 입장료 받는곳이 없었다.

입장료를 받기위한 시설비, 인건비 등을 계산하면 안받는것이 나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지자체들도 고려해 보시길....

 

해미읍성에는 근무하시는분 대부분이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할아버지 할머니 들이시다.

잘 모르는 관광객들이 왜 노인들을 힘들게 저렇게 세워 놓느냐고 물어보는데 노인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3~40분 마다 교대하고

일당을 3만원이상 받아 가신다고 하면 대부분 수긍한다고 한다.   

 

 황명 홍치4년 신해년에 만들었다는 표식. 성종 22년이라고 한다.

 

 동문

 

 

 

 

 

 

 

 진남문 입구에서는 서산의 음악동호회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색스폰을 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