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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서산의 올레길, 아라메길 1코스의 잊혀진 대가람, 보원사지

by 柔淡 2010. 5. 25.

서산마애삼존불상에서 나와 50m쯤 가면 오른쪽에 방선암이란 바위가 나오고 다시1km정도 걸어가면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보원사지라는 절터가 나온다.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배운적도 없고 매스컴에도 소개되지 않아 잘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성기 한때는 100여개의 건물과 천여명의 승려 그리고 다양한 불교유적이 산재했던 무려 3만평이 넘는 큰절터다.

 

보원사지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옛 보원사의 창건연대와 소멸시기는 기록된 문헌이 없어 정확히 알수는 없다. 예부터 전하는 이야기와 출토된 유물로 보아 백제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당간지주(보물 제103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가까이에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경내(境內)에는 몇몇의 건물 장수석(長壽石) 등이 있을 뿐 아무런 건물(建物)이 없다. 그러나 보물(寶物)로 지정(指定)된 석조(石槽)․당간지주

(幢竿支柱)․오층석탑(五層石塔),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동탑비(同塔碑) 등이 있으며 비문(碑文) 기록(記錄)에 의하면 승려 천여명

(千餘名)이 기거했다 하므로 대찰(大刹)이었음이 분명(分明)하다.


이곳에서 서산(瑞山)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까지는 가까운 거리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이 지역은 한국불상의 선구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보원사지 당간지주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

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

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보원사지오층석탑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보원사지 보승탑과 탑비.  왼쪽이 탑비, 오른족이 보승탑이다.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부도(浮屠)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
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
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지대석(地臺石)에서 옥개석(屋蓋石)까지 8각(角)의 평면(平面)을 유지하고 있어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부도이다.
하대석(下臺石)의 사자상(獅子像)과 구름의 조각, 상대석(上臺石)의 앙련(仰蓮)과 난간(欄干) 수법(手法) 등이 주목된다. 탑신(塔身)의 문비(門扉)와
사천왕상(四天王像) 및 인물상(人物像), 옥개석의 귀꽃모양 등은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법인국사(法印國師)는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4년(900)에 출생하여 고려(高麗) 광종(光宗) 26년(975)에 입적(入寂)한 신라말 고려초의 고승으로
이 부도의 건립은 국사가 입적한 때부터 탑비가 건립된 경종(景宗) 3년(978)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는 현재발굴중인 절터이다. 무려 3만평에 달한다고 하니 작업시간이 오래 걸리겟다.

 

 

 

 

 

 

  

 

 

 

 

 

 

 보원사지 석조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있는 곳에서 용현리 계곡을 흐르는 강당천 상류로 약 2km쯤 올라가면 사적 제 316호로 지정된 보원사지가 있다.

이곳에 커다란 장방형의 화강석 통돌의 내부를 파내서 만든 석조가 있다. 보원사지 석조는 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방형의 석조 안쪽과 위쪽만 정밀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친 다듬자국이 남아 있는데 혹시 땅에 붙여두고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다.
석조의 바닥에 직경 약 8cm 정도의 원형 배수구를 만들어 물을 빼낼 수 있도록 하였고 아래로 내려 갈수록 벽이 두꺼워져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석조의 크기는 전체 길이 348cm(안쪽길이309cm) ,폭 175cm(안폭 137cm), 높이 65cm로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조각의 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여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신라말~고려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석조이다.

 

 

 

 떠나기가 아쉬워 마지막으로 다시 보원사지오층석탑을 찍어봤다.

 보원사지는 이번여행에서 내가 처음보는 것이다.

태안에 3년정도 살면서 서산을 일주일에 서너차례씩 지나 다녔지만 서산마애삼존불상이나 보원사지는 이번에 처음보게 된것이다.

하긴 그때는 먹고살기에 바쁘고 오직 출세하는데만 눈이멀어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때다.

이제 50대 중반에 접어들어 욕심도 없어지고 삶에 여유가 생기니 우리역사와 문화에대해 더 많이 알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씩 알아갈수록 그 기쁨이 커진다.

 

서산시에서 30년이란 장기계획을 세워 이절터를 발굴하고 정비한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