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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서산의 올레길, 아라메길 1코스의 유적 선정묘와 여미리미륵

by 柔淡 2010. 5. 24.

330년이나 된 비자나무를 한참동안 올려다본후 길을 찾아보면 바로 선정묘란 안내판이 보인다.

 

선정묘. 선성군을 모신 사당이다.

선성군은 생몰년 미상. 이름은 이무생(李茂生). 정종(定宗)의 4남으로 어머니는 충주지씨 고려 찬성사 지윤(池奫)의 딸이다.
정종이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풍덕(豊德)의 강가로 물러나자 선성군은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으며 담백하고 조용한 마음을
스스로 지켜 권세와 존귀함을 싫어하였다.
이무생은 1427년(세종 9) 자동선·간설매·죽간매를 간통한 혐의로 배천(白川)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종친(宗親)의 예에 의거하여
종학(宗學)에 나왔다는 기사가 세종 12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 되지 않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듯하다.
1444년(세종 26) 다시 주색을 좋아하고, 병을 핑계하고 학문을 게을리한 것 때문에 다시 배천으로 유배되었다.

1454년(단종 2) 3월에 중의대부에 오르고 선성군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에 창기 탁금아(濯錦兒)를 사랑하여 정처를 내쫓은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872년(고종 9) 3월 고종 조에 상보국숭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정()이다.
 

 

 안에는 들어가볼수 없었다.

 마당옆에는 여미리미륵으로 가는길이 표시되어 있다. 

 여미리 미륵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있는 불상으로, 1970년대 지금의 위치에서 1㎞ 떨어진 용장천 정비사업 때 하천에서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냇가에서 5㎞ 쯤 거슬러 올라간 상류에 2구의 불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떠내려온 것

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화강암으로 얼굴과 손등을 조각했으나 옆과 뒷면에는 거친 못 자국이 남았고 목이 부러져 있던 것을

접착하였다.

사다리꼴의 얼굴에 관을 쓰고 여기에 작은 부처를 새겼는데 심하게 닳아 있다. 얼굴 바로 밑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목걸이처럼

늘어져 있고, 옷은 왼쪽 어깨에서 걸쳐 내려와 형식적인 반원모양을 그리고 있다. 왼손은 치켜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받쳐 들고 있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입체감이 없어서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불상으로 여겨진다.

당시 불상(佛像)의 목이 부러진 것을 접착하였으며 목에 삼도가 있고, 옷자락의 주름이 형식에 흐르고 도식화된 감이 있으나 수인(手印)이
금성산 출토(현 부여박물관 소장) 여래입광과 통하고 있어 고려대에 지방화한 양식으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되며 전통불상 양식을 따른 불상이다.

 

 여미리석불을 지나면 유상묵 가옥이 나타난다.

 

ㅡ자형의 사랑채와 ㄱ자형의 안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두 공간은 행랑채와 담장으로 명확히 구별되어 있다. 출입문도 구별되어
각각 안대문과 사랑대문으로 출입할수 있으며, ㄴ자형의 행랑채 익랑에 있는 중문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게 되어있다.
대지전체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후면은 급한 경사지로 되어있다. 대지전면 담장과 사잇담은 막돌담장으로 되어있고, 후면담장은
토담위에 서까래를 걸러 한식기와를 얹어놓았다. 유상묵가옥은 서산지역에 남아있는 전통적인 양반가옥이다

 해설사님의 해설에 의하면 유기방 가옥과 같은 집안으로 에전에 유기방가옥이 큰집, 유상묵가옥이 작은집이었다고 한다.

이집안에서는 국세청에서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 많다고 한다. 

 

 

 이집의 가장큰 특징인 U자형 돌담

 나전헌이란 편액이 붙어있는데 螺자는 소라 라자이다. 앞에있는 산이 전라산이라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운형궁을 본떠서 지었다고 하는데 별로 닮은점은 없다고 한다.

 유상묵가옥에서 내려오면 큰길이 나오고 그앞을 지나는 개천이 역천이다.

 아라메길에 대해 설명하시는 서산시 복혜풍 관광계장님

 원래는 걸어서 가야하는데 시간 관계상 일부구간을 차를타고 갔다. 전라산을 지나 쉰질바위앞 

 이곳이 쉰질바위인데 아주큰 절벽이고 저위에 산소 한기가 있다고 한다.

 

 쉰질바위앞에는 고풍저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