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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해남진도]울돌목에는 다양한 모습의 충무공 동상이 있다!

by 柔淡 2010. 9. 17.

아마 우리나라에서 동상이 제일 많이 세워진 분은 이충무공일것이다.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각지에 세워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이 명량대첩의 주무대인 울돌목 일대에 세워진

다양한 모습의 이충무공 동상이다. 울돌목을 내려다보고 명량대첩을 지휘하며 호령하시는 충무공 동상과, 마치 13척의 배로 

왜의 수군을 어떻게 격파할까 하고 고뇌하시는 모습의 충무공의 동상이 바로 그것이다.

 

명량대첩은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명량해협(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이다.

[역사적배경]
1597년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해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고, 원균(元均)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의 수군과 싸웠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였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조정은 그해 7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남아 있는 전력은 전선 13척과

수군 120명뿐이었다.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이에 이순신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을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에 몇 차례 기습공격을 해왔으나 조선 수군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과]
1597년 9월 14일 적선 55척이 어란포에 정박하자,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겨 명량을 앞에 두고 진을 설치했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적선 130여 척이 명량을 거쳐 우수영 앞바다로 돌진해오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결과]
명량은 간만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

하고자 했다. 9월 16일 새벽 의 수군 130여 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현자(玄字)·지자

(地字)의 총통(銃筒)을 쏘면서 공격했다. 군사력은 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순신은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왜군 준사(俊沙)가 왜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

(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에 왜군이 분노해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적선 31척을 격파했고, 나머지 적선은 달아났다.

[의의와 평가]
명량대첩은 13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왜군이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싸움은 세계해전사의 전무후무한 대승이었고, 조선은 명량대첩 이후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명량대첩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장하기 위해서는 해전 자체만을 놓고 전승의 요인을 분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량해전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해남, 강진, 영암 일대에서는 왜군이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의 의병전도 그만큼 활발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가까운 육상에서 전개된 연해 지역민의 항전이 전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므로 명량대첩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요인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명량해전이 있었을 무렵 가까운 연해지역에서는 영암전몽성·류장춘·박문립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부대의 활동이 수군과의

긴밀한 협력 아래 펼쳐지고 있었으며, 강진해남 일대에서도 역시 활발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대첩을 가능하게 한 주된 요인이 해역의 특성과 조류를 이용한 관방전술(關防戰術)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지휘관만의 전술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명량에 최후방어선을 구축한 것부터 현지의 실정과 지리에 밝은 지역출신 인사들의 책략에 기인한

것이었고, 이 해전의 전투요원들 대부분이 당해 연해지역 주민들이었다고 볼 때 누구보다도 현지 사정에 밝은 그들이 관방에 익숙해 있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회령포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군진을 옮겨 17일간 머물렀으니 전투준비가 모두 여기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참여한 수군의

대부분은 전라우수영 관내, 특히 진도해남, 영암지역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향선을 이용하여 피난길에 오른

우수영 관내 피난민들도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명량대첩은 자보의식(自保意識)으로 결집된 현지의 지역민들이 수군지휘부와 결합, 지형지물을 십분 활용하여 싸운 자전자수(自戰自守)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해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난선을 전선으로 활용, 피난민들이 전장에 뛰어들어 전투를 함께 하였다는 점에서

향보성(鄕保性) 의병항전의 성격을 띤 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진도 녹진쪽에 있는 이충무공 동상, 울돌목을 바라보며 호령하시는 모습이다.

 

 

 시속 14노트의 울돌목

 

 

 

 

 조선시대의 전라 우수영 방향

 

 

 

 매주토요일 전남국악단의 공연이 열리는 녹진무대

 거북선을 타고 바라본 녹진쪽 이충무공 동상 

  

 

 

 

 

 

 

 전라우수영관광지 앞쪽에 세워져 있는 고뇌하는 이충무공 동상

 

 

 

 동상의 위치와 고개숙임이 절묘하여 정말로 고뇌하시는 모습이 느껴진다.

 

2010명량대첩축제가 2010년10월 8일 금요일부터 10월 10일 일요일까지 해남군 우수영관광지와 진도군 녹진관광지 일원에서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