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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서울종로]자연과 역사를 배우는 서울성곽 스탬프투어 와룡공원-동대문 3

by 柔淡 2010. 10. 20.

이번 코스는 와룡공원에서 동대문까지 구간중 성곽이 가장 잘 보존되고 경치가 좋은 혜화문 - 낙산공원 구간이다.

혜화문에서 한성대입구 전철역 지하도를 거너 4번출구를 나오면 주유소가 하나 있는데 주유소옆 골목으로

좌회전 하자마자 언덕길을 오르면 낙산공원의 마지막 성벽이 나타난다. 이곳은 창경궁에서 미아리로 가는

길목이라 성곽이 끊어져 있다.

 

 성곽길에서 보이는 전경이 아름답다.

 한성대입구역 4번출구에서 나와 낙산공원 성곽길로 오르는 언덕길

 이 언덕에서 혜화문이 비슷한 높이로 보인다.

 멀리 북한산

 

 잘보존된 성곽길이 이어진다. 

 옛조상들의 슬기가 보이는 석축방법

 야생화 화단이 있어 아직 까지 예쁜꽃들이 많이 피어있다. 붉은병꽃나무

 나팔꽃과 둥근잎유홍초

 나팔꽃

 

 중간중간에 옛것과 새것의 조화가 보인다.

 

 

 낙산공원 안내도

 

 

 

서울 성곽의 역사를 다시한번 상기해 보자

 

 경복궁, 종묘, 사직단 건립이 완성된 다음 달인 윤9월, 태조는 곧바로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함과 동시에 정도전에게 도성 축조

기본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이때에도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의견이 엇갈려 인왕산 선바위를 서울 성곽 안으로 할 것인가, 바깥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히 대립하였다. 《조선불교통사》에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양쪽의 주장이 너무 강하여 태조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어느 날 큰 눈이 내렸다. 이튿날 아침 한양의 안쪽은 눈이 녹은 반면에 바깥쪽은 여전히녹지 않고 하얗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 녹은 선을

따라 성곽의 선을그었다고 한다. 그때 인왕산 선바위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서울 성곽바깥쪽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결정된 서울 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 18.2km)이었다. 서울 성곽은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축조하기로 계획되었는데,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만 하기로 하고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396년 1, 2월 49일 동안에 걸친 1차 공사에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에서 11만8천 명을 동원하였다.
이때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는 전 해에 궁궐 공사 때 차출되었기 때문에 면제시켰고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도 국방상의 임무를 고려하여 동원하지
않았다. 1차 공사에서 서울 성곽은 대부분 완공되었고, 다만 동대문 지역은 웅덩이로 되어 있어 말뚝을 박고 돌을 채워 기초를 다져야 했기 때문에
늦어질 수밖에 없어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다.

 

성곽의 공사는 총 길이 59,500척을 600척(약 180m) 기준으로 모두 97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하였고, 각 구역을 북악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돌
면서 천자문千字文의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天자부터 조민벌죄弔民罰罪의 조弔자까지 이름을 붙였다. 성곽 전체를 600척으로 나누면 97척 하고도
1,300척이 남는데 이는 인왕산 부근 자연 암반 절벽을 그대로 성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시 가을 농한기인 8, 9월에는 49일 동안 7만9천4백 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준
공하였다. 그리고 문루의 누각들은 공사 후 건축 기술이 뛰어난 승려들을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대문은 2년 뒤인 태조 7
년(1398)에야 준공되었다.

그후 27년이 지난 세종 4년(1422), 세종은 서울 성곽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 정비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는 결과적으로 성곽 전체를 석성으
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이었으며, 1, 2월 농한기 38일 동안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인부와 2천2백 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
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서울 성곽의 기본 골격이다.

이후 서울 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 동안 성곽은 부분적으로 보수했을 뿐 크게 붕괴된 곳은 없었다. 본래 서울 성곽은 도성
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전란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성벽곳곳에는‘진자종면?字終面,진자구역끝지점’,‘ 강자육백척崗字?百尺, 강자구역 600척’등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도道또는 현縣의 담당 지역을 표시하여‘의령시면宜?始面, 경상남도 의령 시작 지점’,‘ 흥해시면
興海始面,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 시작 지점’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후대에는 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다.
가경 9년(1804년) 갑자 10월일嘉慶九年甲子十月日패장牌將오재민吳再敏, 감관監官이동한?東翰변수邊首, 기술자, 편수 용성휘?聖輝등을

기록한 글씨도 보인다.

 

이글자는 충청도 영동지방 사람들이 축조한 곳이라는 표시.

 

 애기똥풀

 동요에 나오는 과꽃

 

 여기도 글씨가 있다. 학산인지, 마산인지

 여기의 글씨는 상당히 마모되어 글자의 흔적만 있다.

 

 

 

 

 

 좀작살나무 열매. 보석같다.

 

 

 성곽의 역사를 요약해놓은 간판

 태조때 처음 쌓은 성곽. 거칠고 조잡하다.

 세종때 다시 보완

 숙종때 6년간 보수. 갈수록 솜씨가 나아짐을 알수있다.

 

 이제 암문을 통해 낙산공원 성곽안쪽으로 들어왔다.

 

 

 

 

 멀리 인왕산

 

 가운데 혜화동 서울대병원이 보이고 그 뒤의 좌우로 길게뻗은 숲은 창경궁과 창덕궁이다.

 

 

 북악스카이웨이 8각정

 서대문쪽의 안산이 보인다.

 이제 흥인지문 (동대문)으로 내려가기전 1박2일에 이승기가 천상의 날개를 찍었던 이화동으로 갈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