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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주]교통의 요지 하늘재와 지릅재 사이에 세워진 중원미륵사지를 가다.

by 柔淡 2010. 11. 9.

충주는 국토의 중앙이라 시로 바뀌기 이전의 명칭을 중원군이라 했다.

남한강 옆에는 국토의 중앙을 가르킨다는 중앙탑이 세워져 있고 신라시대때부터 경상도와 서울을 이어주는 하늘재, 새재가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런국토의 중앙에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한때는 아주 웅장했었을 마륵사지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10여년 전에도 한번 와본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사진을 찍지 않을때라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수면에서 출발해 597번 지방도로를 타고 송계계곡을 지나오다 보니 충주시로 가는 삼거리가 있는지점 바로 옆에

역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직접 피해를 입었 폐허가된 중원 미륵사지 절터가 있는데 예전 명칭은 미륵대원 이라

했단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중원미륵사지이다. 앞에 굳이 중원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는 익산에도 미륵사지라는

유명한 백제시대의 절터가 있기 때문이다.

 

미륵

미륵경에는 미륵상생경미륵하생경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미륵하생경은 미륵이 이 세상에 나와 세상을 구원한다는 신앙을

담고 있으며, 혁명사상을 내포하여 중국한국에서는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미륵신앙은 한국에서 웬만한 마을에는 미륵이라 불리는 돌부처가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민중속에 깊이 파고든 신앙인데,

그 이유는 새로운 세상을 약속한 미륵신앙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사무가에서는 미륵보살이 석가모니의 계략에 의해 세상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현세를 대표한 석가모니와 다음 세상,

새로운 세상을 대표하는 미륵이 대립한다고 불교에서는 이해한 것이다.

 

미륵의 뜻은 위에서와 같은데 우리역사상에 있엇던 미륵사란 이름을 가진 유명했던 사찰들은 전란으로 파괴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 하다.

 

위  치: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문화재: 보물 제96호 등

 고려 초기의 석굴사원 터로서 평균 해발 378m 이상의 고지대로 동쪽 '하늘재' 라고 하는 문경과 접하고 있다.

이 절터는 1977,78,82년 세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절터의 규모와 성격이 부분적으로 밝혀졌다는데, 석굴은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뒤 나무로 만든 목조가구(木造架構)로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석굴형식은 경주 토함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 석굴의 돔형(dome) 지붕과는 다른 방식으로 된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석굴암 석굴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남아있는 석굴에는 본존불로 모셨던 석불입상이 있고, 석굴벽에는 이 본존불을 장엄하기 위하여 조각한 여래좌상 삼불좌상 등이 있다.

그리고, 사역내에는 화강암제의 괴산미륵리 5층석탑 석등이 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수습된 유물 가운데 '미륵당(彌勒堂)' '미륵당혁(彌勒堂革)' '원주(院主)'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편이 있고 지금도

이곳의 지명이 미륵리로 되어 있어 원래 석굴사원의 이름이 미륵대원(彌勒隊員)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굴을 만든 것에 관하여는

고려 태조 왕건의 경영설, 고려 초기 충주유씨(忠州劉氏)의 지원설이 있으며, 또한 석굴축조와 석굴입상 조성을 동일시기로 보는 견해와

서로 다른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동일시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사찰에 얽힌 전설로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의 망한에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러

가던 길에 누이인 덕주공주(德周公主)는 월악산 덕주사를 창건하여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였고, 태자는 이곳에 석굴을 창건하고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월악산 송계계곡을 바라다보는 미륵리 5층석탑

 미륵사지는 14,000평 정도의 직사각형 절터에 일탑일금당이 배치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미륵리사지 내에는 보물 95호인 5층 석탑과

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지방 유형문화재 19호인 석등과 33호인 3층석탑이 있다. 미륵사지의 석불은 국내 유일의 북향 불상이며 석불이

있는 석굴 방형의 주실은 가로 9.8m, 세로 10.75m의 넓이이며 높이 6m의 석축을 큰 무사석으로 쌓아 올렸고 그 가운데 불상을 봉안하였다.

석축 위에는 지금은 없어진 목조 건물이 있었으며 전당은 목조로 된 반축조석굴이다.

 

 

 

 

 

 

 ◇ 미륵리 3층석탑(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3호)
이 탑은 이중 기단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현재 3층 기단 면석과 3층 탑신 윗부분이 없어졌고

노반석만 놓여 있으나 탑신 각층의 비례가 신라식을 따른 단아한 석탑이다.

기단 갑석의 부연이나 옥개석의 형태 등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고려초기로 추정된다.

미륵리5층석탑

 석굴사원 주실앞으로 석등이 있으며 그 전면의 일직선상에 있다. 높이 6m의 석탑은 자연석을 다듬어 지대석과 기단부를 조성하였으며

기단부의 내부를 파내어 4면의 벽석을 만든 형태로 하였다. 옥개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으며 탑신부는 높지 않고 옆으로 늘어진

방형중층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우주와 탱주가 없으며 상층갑석은 2장의 판석으로 덮여 있고 탑신부는 초층 옥계석이 2매이고 기타는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다. 상륜부에는 큼직한 노반이 있고 정상에는 철재로 만든 철주가 있다.

◇ 미륵리 석등(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9호)
미륵리 5층석탑,석불입상과 같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며 전설이나 유래는 석불입상이나 5층석탑과 같다. 고려시대의 석등을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지대석만이 4각으로 되어 있다. 

 ◇ 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
미륵리 5층석탑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주변에 많은 유물이 산재해 있다. 미륵당 석굴에는 11.6m의 석불상을 세우고 3

면의 높이는 6m의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석불상은 6개의 화강암으로 쌓아 올려 거대한 불상을 이루고 있다.

본 입상은 고려초기 10c 경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쪽을 향하고 있는 우리나라불상 두개중 하나이다. 

 

 

 

 

 절경에 지어진 참으로 독특한 구조와 형태의 절터이다.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는 흔적들.

 

 

 

 

 절터에서 마주 보이는 봉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