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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남산]구정연휴에 서울성곽길 걷기, 숭례문 - 장충체육관 구간 1

by 柔淡 2011. 2. 5.

작년 가을에 서울성곽길 걷기를 시작해 처음에는 창의문 - 서대문 구간을 걸었고, 두번째는 와룡공원에서

동대문까지, 세번째 날에는 삼청동에서 창의문까지 걸어보았다.

그중 처음 걸었던 창의문 - 서대문 구간은 출발지인 창의문에서 인왕산 아래까지는 산길이라 그리 헷갈리지

않았는데 중간부분인 국사당 부터 서대문까지는 너무 헷갈리고 표지판도 제대로 없어 포기하고 말앗다.

두번째와 세번째로 걸었던 동대문부터 창의문까지는 역시 산길이 많고 성곽 해설사님과 함께 걸었기에

그리 헷갈리지 않고 걸을수 있었다.

 

구정연휴 첫날 서울 성곽길 나머지 구간인 숭례문 -  동대문 구간을 걷기위해 성곽길 지도를 들고 출발을

하긴 했는데 여기도 시내 한복판이라 남산일대를 제외한 길에서는 많이 헤메고 다녔다.

이왕 서울 성곽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많은 예산을 들여 길을 정비했으면 표지판까지 깔끔하게 만들어서

성곽길 걷기에 나선 시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걸을수 있게 마무리를 잘해줬으면 좋겠다.     

 

서울성곽길인왕산-북한산-낙산-남산으로 이어지는 약 18.7km의 시설물로 조선의 개국과 함께 축조되었다.

4대문인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과 4소문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등 조선의 도읍지 한양을

에워싸고 있는 말그대로 ‘도성’인 셈인데 즉, 최초의 서울은 이 서울성곽길 영역 안까지였다고 보면 된다.

지금의 서울시 면적과 비교해 보면 대략 1/3 정도 크기인데요.

 

숭례문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남산공원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SK건물이 보이고

 

 

 성곽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조금 더 걸어올라가면 힐튼호텔이 있고

 

좌측에 남산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런데 성벽은 계단 좌측으로 축조 되어있다.

 

 

 

 

 

 

 

 

공원계단을 올라와 성곽위에 서면 성곽안내 간판이 있다. 

 

 

내가오늘 걸을 구간은 숭례문부터 흥인지문 까지다.

 

성곽위에서 서울 시내의 풍경을 한참동안 내려다 본다.

 

멀리 남산타워가 보이고

 

 

 

 

 

다시 성곽이 나타난다.

 

바로 남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는데 중앙도서관쪽으로 우회전해서 성곽을 따라서 걷는다.

 

이 구간은 성벽이 온전히 남아있다.

 

 

 

 

 

성곽의 멸실구간을 복원하는 중이다. 

 

서울성곽 안내지도


서울성곽 해설

 

서울성곽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태조는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인왕(仁王)·목멱(木覓)·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 걸쳐 무려 11만 8,000여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지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글자를 표시하여 백악 동쪽에서부터 천(天)자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평지는 아래 부분이 25척, 윗 부분이 18척 되는 너비로 높이 25척의 규모로 흙을 쌓았는데, 그 성벽의 길이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를 쌓고 그 좌우에는 돌로 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해 가을에도 8만명의 정부(丁夫)를 동원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돌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4대문이란 동쪽의 흥인문(興仁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4소문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가르킨다. 이 가운데 흥인문에만 옹성(甕城)을 쌓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숭례문은

1396년에, 흥인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세종 4년(1422)에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면서 더 높게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女墻)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약 32만 2, 000명의 인부가 동원된 이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로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426년 수성금화도감

(修城禁火都監)을 두고 관리를 전담케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수축이 있었고, 숙종(肅宗) 30년(1704) 3월부터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

(三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 975보, 성첩(城堞) 7, 081개로 만드는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또한, 영조 19년(1743)에도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고종 6년(1869) 동대문의 개축이 있었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처음 축조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이 있었는데, 세 차례의 축조는 축조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이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돌로, 윗 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으나,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와 세로가 2척 규모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러한 축조술의 변화는 조선시대 축성술의 전반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지방의 읍성(邑城)과 산성(山城)에도 적용되어진

모범이었다. 1915년 일제는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하여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그 결과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의 성벽과 숭례문·

흥인지문·숙청문ㆍ창의문ㆍ광희문 등이 전체 또는 일부 남게 되었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돌로 된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이후 혜화문이 복원되고 숙청문ㆍ광희문의 문루가 복원되는 등 계속적인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