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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수원]조선시대에도 일반백성이 왕에게 직접 상소를 했답니다. 격쟁

by 柔淡 2011. 3. 30.

조선시대에는 격쟁(擊錚)이란 것이 있었다. 백성이 궁궐 담장에 올라가거나 대궐 안으로 뛰어들어가

꽹과리나 징을 울려 임금님의 이목을 끈 다음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격쟁은 성종 때부터 시작해 왕조 말까지 기록이 이어지는데, 실록에서만 모두 300건가량 검색된다.

수치상 한 해 한 건도 못 되지만, 정조와 숙종 때는 그 수가 두세 배는 되었다.

특히 정조는 바깥 행차 때도 격쟁을 허용해 백성들과 교감을 높였다는 게 후세의 평가다.

 

백성들은 격쟁의 확대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실상을 들여다보면, 요샛말로 로또 당첨이나 다름없었다.

대다수 백성들은 지방에 거주했으므로 격쟁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서울 사는 백성들에게도 그

기회는 희박했다. 천신만고 끝에 설사 임금님 행차에 다가갔다 하더라도, 격쟁을 하고 싶은 사람

구름떼 같은데 그 말을 들어줄 임금은 오직 하나였다.

일반 백성이 억울함을 아뢸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요컨대 격쟁을 통해 백성들이 선정의 혜택을 고루

입지는 못했다. 그것보다는 격쟁을 허용함으로써, 선정을 베푸는 왕의 이미지만 창출된 꼴이었다.

격쟁은 왕을 위한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한겨레신문에서 인용했는데 기사에도 나왔듯이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에 도착하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백성 몇명이 갑자기 대왕의 앞에 꽹가리를 치며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민원인은 많고

들어줄 왕은 한명이니 서로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할려고 왕 앞에서 다투기도 한다.

이런걸 보면 몇백년전 봉건시대의 정치가 오히려 지금의 쇼만 요란한 정치인들의 시장통 행보나

장애인 시설 방문보다도 더 실질적이었던 것 같다.

 

 정조대왕이 행구앞에 도착했다.

 법으로 허용된 격쟁이었기에 백성들이 왕앞에 꽹가리를 치면서 주목을 받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서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다투기도 한다.

 이를 다 듣고난 정조는 신하들에게 백성의 억을함을 해결해 주라고 지시하고

 

 

 

 

 행궁안으로 들어간다.

 

 

 뒤이어 혜경궁 홍씨가 따라서 간다.

 가마를 탄 혜경궁 홍씨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장용영 군졸들의 열무의식이 벌어진다.

 

1784년(정조 8)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를 실시,

무과에서 무려 2,000여 명을 합격시켰다. 이듬해 홍복영()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왕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을 흡수하여 장용위()를 설치하고 약 500명의 인원을 5대()로 나누어 편제하였다.

1788년 장용영으로 개칭하였고, 1793년 도성() 중심의 내영()과 그 외곽인 수원 성곽(사적 3) 중심의 외영()으로 확대

편제하여 기존 5군영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795년 다른 군영의 군대를 흡수해서 5사() 23초()의 편제를 갖추었고

장용사(使:장용영 대장)가 이를 지휘하였다. 1802년(순조 2) 폐지되었다.

 

 

 

 

 

 

 

 

 

 

 이 사람들은 수원시 무예24반 연무회원들인것 같다.

 

 

 그리고 일반 군사들은 군인아저씨 들이다.

 

 

매월 2, 4주차 토요일에 화성행궁에서 다양한 행사를 할 예정이라니 수원관광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찾아가서 즐겨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