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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수원]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퍼레이드, 정조대왕능행차연시

by 柔淡 2011. 3. 30.

능행차 연시라는 어려운 한문용어를 알기쉽게 설명하면 정조가 서울로 부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현재의 화성시 태안읍 융건릉 지역까지 어머님 헤경궁홍씨를 비롯한 문무백관을 이끌고 다년간 행적을

재연하는것이다.

 

그 유래는

1776년 3월 조선조 제22대 왕으로 즉위한 정조가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에

수원부 화산(현 화성군 태안읍)으로 옮기고, 지극한 효성으로 이곳을 자주 참배하였는데, 이 참배시 행하여진

왕의 행렬을 말한다.

13차례 화산 능행차중 가장 대규모로 시행된 1795년 2월 능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의 반차도 그림에 나타난 사람이 1,505명, 말이 516필이며, 여기 그림에 생략된 인원을 합하면 사람이 1,807명, 말이

796필이며, 본 행사에 동원된 전체인원은 사람이 5,661명, 말이 1,417필이다.

 

1795년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태어난지 60년이 되는 해이며 또한 정조가 즉위한지 20년이 되는 경사스런 해였으며

이 해에는 수원 화성행궁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연, 노인잔치, 과거시험 등이 치러졌다.

수원시에서는 이 행렬을 세계최대의 가두 퍼레이드로 발전시키기 위해 세계문화 유산인 "화성" 축성 2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1996년부터 매년 정례적으로 실시한다.

3,000여명의 출연인원과 수많은 장비, 의상, 소품이 소요되는 정조대왕 능행차연시는 가히 한국의 「수원」을 상징하는

퍼레이드로 세계인에게 기억되고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는 능행차연시 재현의 커다란 의의라 하겠다.

 

행렬의 구성

이 행차의 특징은 관례상 국왕이 중앙에 위치하는 다른 행차와는 달리 정조가 앞에서 인도하고 혜경궁홍씨가 행렬의

중심이었으며 전체의 행렬은 경기감사가 선두에 서고 그 다음에 총리대신, 훈련대장, 금군별장, 어보마, 정조가마,

혜경궁홍씨 가마, 정조의 두 여동생 가마, 선기장, 장용대장, 도승지, 병조판서 순으로 정조대왕의 능행렬이 이어진다

 

이런 역사가 있는 능행차연시는 해마다 수원화성문화제때에는 정식으로 대규모로 진행되며 올해는 지난 3.월27일

연무대 광장으로부터 화성행궁까지 약식으로 진행되었다.

 

 화성행궁에 도착한 정조대왕

 대왕이 도착하기전 수원도호부 부사가 미리 나와 정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고

 

 

 발빠른 파발들이 먼저 뛰어와서 대왕의 도착을 알린다.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들도 미리나와 정조의 도착을 기다리면

 

 

 

 정조대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행궁에 도착한다.

 

 

 

 경기감사가 선두에서 대왕을 안내하고

 

 이어서 총리대신이 등장하는데 총리대신이라는 직책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아마 영의정이 아니었을까?

 

 이어서 훈련대장이 들어서고

 

 

 

 

 그다음이 정조대왕

정조대왕이 도착하면 격쟁이 펼쳐지는데....

 

격쟁이란 조선시대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꽹과리[錚]·북[鼓]등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