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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수원]정조의 효심과 왕권강화에 대한 집념이 담긴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1

by 柔淡 2011. 4. 9.

수원화성은 평소에도 1년에 한두번식은 걸어보는데 이번 팸투어처럼 해설사님의 해설을 들으며

걸어보는건 이번이 처음이다.

연무대에서 화홍문까지는 걷고 거기서 부터는 화성열차를 타고 팔달산 서장대 아래까지 갔다.

 

 

원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아래가 그 중심이었다. 조선 정조 13년(1789)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관공서와

민가들을 팔달산 아래로 집단 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다.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영의정 채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화성유수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구조 배치가 가장 과학

적이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까지 갖추고 있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벽돌을 병용한 것,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와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용재를 규격화하여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화성」은 ’97. 12. 4.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장대.

연무대라고도 부르며 화성 시설물 중 가장 위용이 있고 평상시 군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장대입니다..

지붕형태는 팔작지붕 형식이며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벽체를 설치하지 않았고 또한 뒤에는 기와를 이용 영롱담을 쌓았다

 해설사님

 

 

 

 총안구, 원거리와 근거리를 구분해서 쏠수있다.

 북암문

암문은 전시를 대비한 비밀통로로 성곽의 굴곡된 부분이나 후미진 곳, 수목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되어 있다.

암문은 동북각루 남측의 후미진 곳에 있으며 성밖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아 암문으로서는 가장 적절한 위치다. 암문의 모양 또한 아름답다.

 

 

 동북포루

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이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七楹)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북암문

 방화수류정 동북각루라고도 한다.

시설물명
동북각루(東北角樓)
상세정보
동북각루는 벽성의 서북 19보 용연(龍淵)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1면을 제압하고 있다. 그리고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다.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 씀]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남쪽 동쪽 북쪽의 3모퉁이에는 5번 꺾인 팔각(八角)으로 각각 종횡의 짧은 대들보를 얹었다. 지붕 용마루의 네모진 서까래가 들쭉날쭉하여 처마를
번쩍 들고 있으며 지붕 용마루에는 망새[鷲頭]를 교착시켜 꽂았는데, 한 가운데에 3마디 절병통(節甁桶)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다. 동북쪽 평난간
밖에는 또 처마마다 판자를 깔아 성두(城頭)를 위압하고 있다.

 작년 가을에 찍은 사진

 지금은 이렇게 공사중이다.

 용연(龍淵)은 북성 밖에 있는데, 모양이 반달 처럼 생겼다.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고, 가운 데에 작은 섬이 있다.
못위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 내게 되어 있다.

 방화수류저에서 올려다본 팔달산 서장대

 

 화홍문. 홍예문이라고도 한다.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그 동서로 3간은 아래

너비가 8척 높이가 7척 8촌, 가운데 한 칸은 너비가 9척, 높이가 8척 3촌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화성열차 동력1칸 무동력3칸으로 구성되어 연무대에서 팔달산 까지 4대가 하루 12회 운행한다.

성수기 주말에는 인기가 좋아 두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탈수있다. 

 

 

가을에 찍은 수원화성도 있는데 참고 하시려면 http://blog.daum.net/j68021/13744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