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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3.1운동시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부했던 33인중의 한분 옥파 이종일 생가

by 柔淡 2011. 6. 9.

두웅습지에서 나와 다음으로 간곳은 태안의 독립운동가 옥파 이종일의 생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의 한분인 이분의 활동에 대해선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옥파 이종일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의 닻개(碇浦)에서 성주 이씨인 교환(敎煥)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일찍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머리가 매우 명석해서 감히 다른

사람들이 그를 추종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는 호를 옥파라 하였는데, 그후 천도교에 입교(1905)한 다음 묵암(默菴)이란 도호(道號)를 받았으며,

그 밖엔 필명(筆名)으로 천연자(天然子)·중고산인(中皐散人)·중헌(中軒) 등이라 하였다.

옥파선생은 일찍 15세 때에 웅지를 품고 고향을 떠나 상경(1873)하여 다음 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후 1882년에는 박영효(朴泳孝) 수신사를 따라 일본(日本)에 건너갔었는데, 당시의 일본사회의 개화된 실상을

목격하고 귀국하였다. 옥파선생은 이때부터 마음의 한 구석에서 개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적으로

개화이념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후로 16년 뒤인 1898년의 운양 김윤식(雲養金允植)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김윤식 선생은 당시 대한학자(大漢學者)였는데, 옥파선생은 그의 계동(桂洞) 자택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열강의 각축전 속에 국운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만큼 누란의 위기에 봉착

했던 구한말(舊韓末), 이때 옥파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구국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우선 固陋한 舊習을 打破하지 못하고 있는 國民들에게 개화사상과 자강의식을 鼓吹시키고 啓蒙하기 위해 純한글로

된 帝國新聞을 創刊하였던 것이다. 또한 옥파는 오늘의 새마을 정신에 해당되는 이른바 「新村精神」을 제창하여

국민의 의지적이며 보존적인 정신을 개조하여 진취적이며 활성화된 국민의식의 재구성을 추구하였다.

이같이 선각자로서의 뛰어난 探究力과 총명한 재질을 지닌 옥파선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 警鐘一世의 直筆을 휘두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 옥파는 실학계통의 학문을 전수하여 이를 실천하였으니, 즉 새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신교육을

실시하여 인재양성은 물론, 여성교육의 필요성과 여성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한편 발달한 서양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여 시국근대화를 촉진시켜 국력을 권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옥파선생은 獨也靑靑한 志操와 의로운 행동으로 68년간의 생애를 통해 애국애족의 일념에 한 점의 추호도 없었으며,

더구나 3.1독립 운동에 즈음하여 일제하의 장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각 要路에 배부한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1독립 운동이 獨立宣言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때에 이 33인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33인의 이름은 우리 近代史의 위치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중 일부 인사들이 변절 또는 挫折하였으니,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옥파는 33인의 命脈的 의미를 살린 인물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옥파선생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아심마저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옥파이종일선생은 길이 千秋에 特技해야 할 人物인 것이다.  

이렇게 일본제국주의 총칼과 맞서 싸우며 오로지 救國一念 속에서 한스런 생을 마친 고귀한 분이었다.

이미 90년전에 제창한 옥파의 포부와 애국사상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새롭게 빛나고, 또한 후인들에게도 길이 木鐸이 되고,

아울러 不滅의 상징으로서 민족의 指標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특히 오늘에 사는 우리들의 정신 계발에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옥파는 3.1독립 운동 당시 民族代表로서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낭독한 독립운동가이며, 따라서 언론인 교육자, 종교인,

개화사상가, 한글학자 실학자 여성운동의 先覺者 그리고 민족주의자로서의 뛰어난 애국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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