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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대구달성]조선5현중의 으뜸 한훤당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

by 柔淡 2011. 7. 14.

2일차에는 주로 달성군지역을 둘러보았는데 4대강 공사의 일환으로 공사를 마무리중인 달성보

건설현장을 보고 현풍추어탕집에서 점심을 먹은후 오후에 찾은곳이 도동서원이다.

1986년 진해 육군대학에서 1년 공부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달성을 많이 지나 다녔지만

이런 중요한 유적지가 있는줄 알지도 못햇었다. 영남지방에도 많은 문화유적이 있는데

내가 과문한 탓인지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된다.

 

먼저 조선 5현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조선 오현(五賢)은 조선시대 유명한 5명의 유학자를 말하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등입니다.

훈구 . 사림의 오랜 대립기를 거쳐 선조의 즉위로 사림정치 시대의 장이 열리면서 사림들은 김굉필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오현으로 추존하고, 뒤이어 오현의 문묘종사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광해군 2년(1610)에 대간과 성균관 및 각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鄭汝昌) ·

조광조 · 이언적(李彦迪) · 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의 五賢하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을

가리킵니다.

 

조선시대 사림(士林) 오현(五賢) 중에서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4명이 영남 출신이고, 이 밖에도 많은

학자들이 배출돼 우리의 사상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

(曹植) 두 사람은 당대의 사표(師表)로서 늘 병칭됐으며 각기 퇴계학파(退溪學派)와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종사(宗師)로서 후학들로부터 극도의 추앙을 받았다.

이런 조선5현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김굉필을 모신 서원이 도동서원이다.

 

도동서원은 조선 5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향사한 서원으로 선조

원년(1568) 지방유림에서 현풍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불렀는데 창건 5년 뒤인

선조 6년(1573)에 같은 이름으로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그 후 선조 38년(1605)에 지방의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불렀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다. 선조 40년(1607)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도동서원은 고종 2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철폐되지 않은 전국 47개 중요서원의

하나로 사림과 후손들의 두터운 보호 하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원은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

(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있으며, 통로와 계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軸)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구성과 배치형식은 조선시대 서원건축으로서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물들의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구성 및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石物)들도 그 기법이 우수하다.

현재 하사제기(下賜祭器)와 경현록(景賢錄) 판각이 보관되고 있다.

 

그런 도동서원을 한눈에 볼수 있는곳이 다람재라는 고개다.

그곳에서 보면 도동서원의 모든 건물이며 배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길지이다. 낙동강 건너는 옛가야땅이엇던 경남 고령이다.

 

 

 

 

 여기도 4대강 공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 장마철에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

 

  

 

 

 도동서원입구에서 올려다본 다람재

 여기도 전형적인 물도리동이다.

  이제 도동서원을 자세히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