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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대구달성]조선 서원건축의 전범, 도동서원

by 柔淡 2011. 7. 15.

서원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교육기관이었다.

역사에서 배웠듯이 서원의 출발을 좋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원의 폐해가 너무 많아지자

고종 2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내렸고 전국 650개 서원 중 603개가 철폐되었고

중요하거나 특색이 있는 47개의 서원만 남게 되었다.

그때 남겨진 서원중에서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영주의 소수서원등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데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때문에, 병산서우너은 만대루 라는 독특한 건물때문에

그리고 소수서원은 한국최초의 서원이라는 이유로 많이 알려지게 된것이다.

 

그런데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서원중에서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물들의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구성 및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石物)들도 그 기법이 우수한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도동서원은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있으며, 통로와 계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軸)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도동서원은 특히 조선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있다.

 

그러면 건물을 하나씩 살펴보자

 

※여기 인용한 내용들은 한겨레신문 구본준 기자의 도동서원 탐방기와 네이버 지식인을 참고로 한것입니다.

 

 서원의 대문인 수월루

수월루는 애초 이곳에 서원이 들어설 때는 없었던 건물로 1855년 창건되었으며,서원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은 것이며, 지은지 얼만 안된 1888년 불타버려 오랫동안 터만 남았다가 1973년 복원되었다.
누각 아래가 출입문이지만, 닫혀 있을 때는 관리사로 쓰이는 전사청(典祠廳)을 통해 드나들어야 한다

 

 [환주문]
환주문(喚主門)은 부를 환(喚) 주인 주(主)로 읽고,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이다라는 뜻이 숨어있다 한다.
갓 쓴 선비들은 고개를 숙여 들어오도록 처음부터 문을 낮게 만들었으며, 배움의 문으로 들어서는 선비는 스스로 마음가짐을 낮추고, 내 마음의 주인을 불러보게 한다.
작은 일 하나하나에도 예사롭지 않은 옛 선비의 높은 정신 문화 앞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환주문 바닥의 연꽃모양돌

서원 곳곳엔 연꽃을 새겨놓은 것이 많은데...불교를 따라 한 이유도 있지만 여기 연꽃 모양은 밖에서 급히 들어오다가
잠깐 멈추어라...라는 의미로 중간문  바닥에 박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돌담장

 

 서원은 무조건 2중 구조다. 앞에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공간, 뒤에는 학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배향 공간이다. 지금 마주치는 앞 공간은 가운데 강의실 역할을 하는 본 건물이 있고, 양옆에 제자들이 지내는 기숙사 건물을 거느린다. 동쪽과 서쪽 양쪽이어서 동재와 서재라고 부른다.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 (보물 350)]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다.
1604년(조선 선조 37) 건립하였다 강당 정면 5칸, 옆면 2칸이고, 사당은 정면 3칸, 옆면 3칸으로 단층 맞배지붕이다.
현판과 기둥에 한지로 붙인 흰 띠.서원 중에 으뜸이란 표시로 흰 띠를 두르게 했다 한다. 

 선조가 친필로 하사한 도동서원 현판, 임금이 직접 친필로 현판을 내린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하며 서원중에서도 특히 우대를 받앗다.

한옥 천장은 나무 구조가 그대로 노출되는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굽은 나무들을 써서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친다. 서원은 건물이 자리 잡는 위치에

가장 신경을 쓰는 건축이다. 그래서 꼭 서원의 중심인 강당 마루에 앉아 앞을 바라봐야 한다. 바깥에서 건물을 바라보는 모습보다 안에서 바깥을 보는

모습을 중시한 한옥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정당 마루에 앉으면 서원이 마주보는 낙동강과 강너머 앞산까지 일직선 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야간에 조명을 올려놓는 대

축대 중간에는 용 머리 돌조각들이 튀어나와 있다. 그 모양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용머리가 4개가 달렸는데, 사진에 보이는 것만 원래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훼손되어 나중에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중정당의 뒷모습

유생들이 기숙사로 쓰였던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이다. 
거인(居仁)과 거의(居義)는 맹자 이루 상(上)장에 자신이 인(仁)에 머물러 의(義)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吾身, 不能居仁由義, 之謂自棄也)에서 나오고 있다

거의재

거인재

군자는 생활에 편안함을 찾아서는 안 된다(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는 공자의 말씀에 따라, 선비들은 불편한 생활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좁고 답답한 방이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을 익히는데 훨씬 낫다고 생각하였다.

거인재

소박한 굴뚝

장판각]하사제기가 유전, 보관되어 있고 장판각에는 경현록 판각이 보관되어 있다

사당이다. 봄 가을이면 향사를 올리고 매달 두 번씩 분향례를 치르는 곳이다. 평소에는 문을 잠가 놓는데 관리하는 분께 특별히 부탁을 드려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사진을 찍는데는 아주 복잡한 절차가 있었는데 그건 다음번에 포스틴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