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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대구달성]임진왜란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시게된 비슬산 용연사2

by 柔淡 2011. 7. 13.

극락보전을 돌아보았으니 이제 용연사를 유명하게 만든 적멸보궁과 금강계단이 있는 왼쪽으로 간다.

용연사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는 임진왜란때 온갖 역경을 헤치고 양산 통도사, 금강산, 치악산 각림사

를 거쳐 용연사에 모셔지게 되었고 그 사리로 인해 용연사가 더욱 알려지게 된것이다.

 

이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곳을 적멸보궁이라 하는데 원래의 5대 적멸보궁과 추가로 세군데를

더해서 8대적멸보궁이라고 하기도 한다.

 

적멸보궁석가모니불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으로 석가모니불이 미혹()의 세계를

벗어나 항상 적멸의 낙을 누리는 곳이다.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예불을 올릴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설치해 둔다. 부처의 존상이나 후불탱화도 없고 다만 법당 바깥에 사리를 모신 탑이나 계단()

을 설치한다.
 
한국의 오대적멸보궁은 ①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중대()

상원사()의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을 말한다.

이들 적멸보궁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590∼658)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와

정골()이 모셔져 있다.

통도사에는 자장이 반야()의 지혜를 갖추기 위해서는 그 근본인 계를 금강석처럼 굳건히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금강계단()을 쌓고 석가모니의 가사와 진신사리를 모셨다. 상원사에는 자장이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거주지로 보고 사리를 모신 뒤 적멸보궁을 쌓았는데, 뒤에 신라 신문왕의 두 왕자인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 중 하나인 중대지로산()에 절을 지었다. 지금은 불사리를 안치한

장소를 알 수 없고, 뒤쪽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 불탑이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설악산 봉정암 역시 자장이 창건하고 5층석탑에 불사리를 안치한 곳이다. 태백산 정암사도 자장이 문수보살의

모습을 보기 위해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보궁 건물 뒤쪽 산 위에 수마노탑이 있다. 사자산 법흥사에는 진신

사리가 안치된 보탑과 자장이 도를 닦았다는 토굴, 자장이 경전을 담아온 석함 등이 있다.

[출처] 오대적멸보궁 [五大寂滅寶宮 ] | 네이버 백과사전

 

여기에다가 비슬산의 용연사, 선산의 도리사, 고성의 건봉사 등 다른 연유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게된

세곳의 사찰을 추가해서 8대적멸보궁이라고 하기도 한다. 

 

용연사 적멸보궁 

 극락전에서 적멸보궁으로 가는길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

 

 

 

 

 

 금강계단

 

 적멸보궁

 

 여기서도 극락전과 같은시간에 기도를 드리고 있다.

 

용연사 석조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이곳에 봉안된 사리는 신라 선덕왕 때 고승인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구법(求法)하고 돌아오는 길에 2과(二顆)를 가져와 두 함에 넣어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통도사의 사리탑을 파괴하고 사리를 도굴 했으나 유정대사가 격문을 보내어 송환 받았다.

이에 송운대사가 받들고 금강산에 가서 서산대사의 명을 받아 태백산 보현사와 통도사에 안치코자 하였다. 그러나 전란과 송운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봉안하여 오던 것을 청진스님 등이 현종 14년(1673) 5월 5일에 이곳 용연사에 사리탑을 건조하고 안치하게 되었다.

계단은 석조로 된 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석종형 탑신을 중앙에 안치한 형식으로 상층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상을 양각하고 하층기단의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했다.(사천왕상은 도난 우려로 별도 보관중임) 팔부신상과 사천왕상은 예리한 조각기법은 아니나 섬세하고 균형을 이루어 단조로운 사리탑 구조에 균형적인

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그 수법이 상당히 우수하다.

 

 적멸보궁에서 기도중이라 제대로 찍지 못했다.

 

 

 

 좌우로 이런건물이 하나씩 있었다.

 

 금강계단 뒤쪽현판은 보광루

 

 

 

 

 부도군

 

 

 

 

 

 

참 고즈넉하고 독특한 절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