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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종로]가을의 초입에 경복궁을 돌아보다 8 - 왕과 왕비의 침전, 강녕전과 교태전

by 柔淡 2011. 10. 15.

구중 궁궐이란 말이 있는데 왕과 왕비의 침전은 경복궁 내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어서

그런말이 생긴것 같다.

그외에도 경복궁과 청와대로 연결되는 문인 신무문도 돌아보았다.

 

강녕전

사정전을 뒤돌아 가면 행각에 연이어 있는 향오문이 나오는데 이곳이 궁궐의 침전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경복궁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영역이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고, 다른 하나는 강녕전의 후면에 있는 양의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다. 궁궐에서 침전은 왕과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내진연)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사와 관련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는 곳 또한 침전이다.

세종 때에 임금이 오래 머물 곳이라 하여 규모를 크게 하여 고친 후 온돌을 수리하는 도중 화재가

발생하는 등 세 차례의 화재를 당하였다. 역시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세워졌으나 1918년 창덕궁의

침전이 소실되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목적으로 헐렸으며 1920년 창덕궁의 희정당을 짓는데 사용

되었다. 지금의 강녕전은 199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강녕전의 공간구성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 넓은 월대를 꾸민 것이 특징이다. 이 월대는 의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내진연, 외진연 등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잔치 때에는 주변에 보계(補階)를 설치하여 보조하기도 하였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에 해당하며 월대에서는 의례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강녕전과 교태전에는 용마루가 없는데 정사에는 그이유가 나와 있지 않지만 해설사들은 임금을 용과 대등하게 보던 예전에는

한건물에 용이 두마리 있을수 없다고 보아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한다.

 편전(便殿)은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이다. 또 종친, 대신들과 함께 주연을 즐기고, 왕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 곳이다. 경복궁의 편전 영역은 사정전(思政殿)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정전 영역으로 통하는 사정문과

침전영역으로 통하는 향오문 사이에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이 남향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행각이 감싸고 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도 강녕전과 같은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다만 전면에 월대가 없는 것이 다르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공간구성 뿐만 아니라

집의 구조도 같은데 지붕꼭대기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고 내부에는 종도리를 두개 나란히 두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침전이 이와 같이 용마루를

두지 않는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교태전 또한 강녕전과 같은 시기에 헐렸으며,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데 활용되었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이 곳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에는 다양한 화초를 심어 화계를 꾸미고 교태전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빠져 나갈 수 있는 굴뚝을 세웠다.

또한 호수나 연못을 상징하는 모양의 석함(石函)을 두어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을 조성하였다.  

중건된 교태전 또한 강녕전과 같은 시기에 헐렸으며,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데 활용되었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이 곳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이라 하였다.
 
중건된 교태전 또한 강녕전과 같은 시기에 헐렸으며,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데 활용되었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이 곳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이라 하였다.
 
중건된 교태전 또한 강녕전과 같은 시기에 헐렸으며,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데 활용되었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이 곳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이라 하였다.
 

중건된 교태전 또한 강녕전과 같은 시기에 헐렸으며,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데 활용되었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이 곳을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이라 하였다.
 

 교태전 뒤쪽 아미산의 아름다운 굴뚝들

 

 

 

 

 

 

 만춘전

 

 동궁영역. 이번에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된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이 세자시절 단종을 낳기도 하였으며, 고종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다.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내·외 소주방이 있었다.

 자경전 영역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44간의 규모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온돌방으로 꾸며진

복안당과 자경전, 동남쪽의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연루의 동측으로 협경당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 남쪽으로 행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

여자들이 여닫기 쉽게 가벼운 당판문으로 된 만세문이 있다

 

건춘문

 건춘문은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 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이다.

 

 국립민속고궁박물관

 

 경회루에서 신무문으로 가는길

 

 좌로부터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이 3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이다. 고종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사신 접견장으로 사용(1893년 한 해에만 영국, 일본,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다섯 차례 접견)하였다.
이 3채의 건물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집옥재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米連, 字 元章)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집옥재에서 신무문으로 가는길에 이런 공간이 있다.

 신무문

 이문을 나가면 청와대가 있다.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세워진 것이다.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이 있어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에는 이 문을 이용하였다. 또 영조 때에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동일하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 시 건립된 것이다.

 

 신무문에서 바라본 청와대

 

이제 가을이 깊어 단풍이 물들면 다시한번 서울의 궁궐을 돌아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