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군위]우리나라 역사기록의 보물창고인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by 柔淡 2011. 11. 19.

사실 군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이다.

고려시대 일연이라는 스님이 쓰신 이책에 정사인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다양한 이야기와

설화들이 사실로 입증되면서 삼국유사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데 그 삼국유사가

군위에 있는 인각사란 절집에서 쓰여졌다는걸 알고부터는 언젠가 곡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인데 이번에 처음으로 와본것이다.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연대는 미상이나 1281년~ 1283년

(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이

최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使)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除)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제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 신화가 수록된 설화문학서(說話文學書)라고도 일컬을 만하여, 특히 향찰(鄕札)로

표기된 <혜성가> 등 14수의 신라향가가 실려 있어 <균여전>에 수록된 11수와 함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의 전부를 이고 있어 한국 고대 문학사의 실증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육당(六堂) 최남선은 일찍이 본서를 평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 이라고 까지 하였다.

 

그런 삼국유사가 이곳 인각사에서 저술된 것이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어 고려 충렬왕 10년에 왕명으로 크게

중건(重建)되고 토지를 하사하여 보각국사 일연 스님께서 하산소로 정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불교서적 100여권을 저술하였고,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이나

열었습니다. 조선 숙종때 다시 중수(重修)되어 숙종 25년에 당시 의흥 현감 박성한에 의하여 증축되었

답니다. 경내에는 중국 왕희지의 유필로 집자한 보각국사 탑 및 비가 보물로, 사찰주변은 사적지 제374호로

지정되었고, 석불상과 부도가 있습니다.

 

이 곳은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신령면을 남북으로 가르며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해발 828m의 장엄하고

준수한 태산준령의 화산(華山)에서 서서히 완만한 능선을 이루며, 비단같이 깔리면서 위천 상류를 흐르는

개울가에 이르러 끝을 맺고 있는데 이 개울을 건너면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인각마을입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인각 마을의 내력은 기린이 노닐다가 뿔이 암벽에 걸려서 떨어진 곳이라고 하며,

화산의 화려하고 기품 있고 당당한 모습이 마치 기린의 형상을 닮았으며, 인각 마을의 위치가 그 뿔의 지점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구전되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각사 전경

 

 극락전 복원 및 명부전 이전공사중이라 약간 어수선 하다.

 

 

 

 

 

 

 인각사 석불당좌상

이 불상은 팽창된 얼굴에 가늘고 길게 새긴 눈,작고 도톰한 입술등은 8세기중엽경의 붕상약식을 나타내며, 강.약 없이 흘러내린 의습선은 9세기불상들과 일련의 양식적인 궤를 같이한다.머리부분의 손상이 심하며, 두팔과 무릎이 거의 깨어져 없어졌고, 코도 떨어진 것을 복원했으며, 목도 절단된 부분을 붙여 놓았다.

 인각사 보각국사탑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운데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습니다. 윗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탑몸도 8각으로 정면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이름이 있고, 뒷면에는 문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겼습니다. 지붕의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느리게 들려 있고, 낙수면은 급한 편이며 지붕선 끝부분에 꽃장식이 달려 있습니다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려져 있습니다.

탑의 상층은 불상, 중층은 연화, 하층은 토끼·사자·원숭이 등 여러 동물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승려 일연스님 노모의 묘를 비추었다고 합니다.  팔각의 탑의 중심부에 보각국사 정조지탑이라는 탑명과 사천왕입상과 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탑이 인각사 동쪽 2km 떨어진 부도 골에 있었으나 외지 사람들이 자기 조상의 묘를 안장하기 위해 1928년 서편으로 50m쯤 옮겨 놓은 것을 1978년에 인각사 경내(境內)로 다시 옮겼다고 합니다.

 

인각국사 보국사탑비각 

국사(國師)의 불제자(佛弟子)인 법진(法珍)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높이 6자, 폭 3자반, 두께 5인치인 탑신(塔身)의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명문이며, 글씨는 왕명에 의하여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유필(遺筆)을
집자(集字)하여 만들었으며, 지금은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있어 알 수 있습니다. 

 독특한 형태의 영산각

 

 

 

 

 일연선사 생애관

 

 

 

 

 

 

 

다음에 인각사가 완전히 정비되면 다시한번 와봐야 하겟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