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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공주]백제시대 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역사를 간직한 공산성 1

by 柔淡 2011. 12. 22.

군생활을 하는 동안 계룡대에 6년, 대전의 32사단에서 5년 등 도함11년을 근무하면서 공주엘

자주 갔었는데 이상하게도 사진한장 남겨놓은게 없다.

주말마다 전국각지로 여행을 다니면서도 공주와 대전은 잘 안다는 생각으로 한번도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제대로 아는게 한가지도 없는게 아닌가!

 

지난 12월초, 저녁에 유성에 모임이 있어 가는길에 공주의 몇군데를 둘러보려고 일부러

아침일찍 출발했다. 그러면서 처음 찾은곳이 공산성이다. 

부여엔 여러번가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는데 제대로 마음먹고 공주를 둘러보는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원년(475년)에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성왕 16년(538년)부여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웅진시대의 방어거점이었던 고대성곽이다.

공주시 금성동, 산성동, 옥룡동에 걸쳐 남으로는 시가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금강의 연안에 접해 있는 해발

110m의 야산에 위치하며, 동서의 길이가 약800m, 남북의 길이는 약400m의 타원형 형태를 띠고 있는 포곡형

산성이다. 성곽의 둘레 2,660m로 이중 석축부분은 1,930m, 토축부분은 730m에 달하고 동남부에서는 이중이다.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2~7m이며 너비가 3m 정도인데 바깥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선조, 인조 때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도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변천 속에서 시대별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였으므로 각 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성의 명칭은 백제시대 축조 당시는 웅진성, 조선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쌍수산성으로 불리고 일제강점기

에는 공원제도 창설에 산성공원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성곽의 부대시설로 사방에 동쪽 영동루, 서쪽 금서루, 남쪽 진남루, 북쪽 공북루의 문루가 남아 있다. 성내에는

임류각, 연지(2개),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영은사, 군창지, 명국삼장비 등이 있다. 이중 명국삼장비는 일제강점기 말

공주읍사무소에 묻혀 있던 것을 해방 후 이곳에 옮겨 놓았다.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의자왕이 일시 거쳐 가기도 하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으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하였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며 각 시대별로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엿볼 수 있다.

 

2.7km의 공산성을 일주하는데 한시간정도 걸린다는데 사진을 찍으며 걷다보니 한시간 반정도 걸린것 같다.

일주는 주차장이 있는 서쪽 금서루에서부터 시작한다.

 

 공산성 입구

 금서루 입구 비석군. 주로 조선시대 공주목에서 근무했던 충청관찰사들의 공적비다.

저들이 공덕비를 세워 칭송받을만큼 백성들을 위해 근무했는지 의문이고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공덕을 자화자찬 하는것에 익숙한 모습니다. 

 

 

 금서루. 공산성의 서문이다.

 금서루 안쪽

 금서루 바깥쪽

 

 

 공산정, 2층 으로된 정자인데 금강일대가 멋지게 내려다 보인다.

 

 

 공북루

공주시가의 동북단에 위치한 이 건물은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망북루()를 1603년(선조 36)에 중수하여 공북루라 이름한 것으로, 금강()을 향하여 서 있다. 높은 기둥을 세워 2층의 누각()을 만들었는데 위층에는 누마루를 깔고, 아래층은 통행로로 삼았다.

위층 누마루 4면에는 청판()을 끼운 낮은 난간()을 돌렸고 처마 밑은 공포와 창방()을 생략하고 기둥머리로써 직접 주심도리를 받쳤다. 각 칸의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일정하며 지붕 가구는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단청이 되어 있다. 누벽에는 중수기()와 시서() 등이 걸려 있고, ‘공북루’라 씌어진 현판은 추녀 밑에 걸려 있다.

조선시대 문루로 대표적인 이 건물은 1663년(현종 4) 관찰사 오정위()가 중수하고 송시열()이 중수기를 썼으며, 지금의 모습은 1964년에 보수한 것이다. 누의 바깥쪽에는 석성이 쌓여 있으며 창건 당시 옆에 함께 지었다는 월파당()은 1654년 붕괴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다시 금서루쪽을 돌아본다.

 금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1700년을 이어온 역사답게 나무한그루 한그루가 온갖 풍파를 겪은 형상으로 서있다.

 

 

 

 잠종냉장고

 

2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