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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공주]백제시대 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역사를 간직한 공산성 2

by 柔淡 2011. 12. 24.

공산성은 백제시대부터 토일신라, 거려, 조선을 거치면서 시대별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그러다보니 작은 성안에 여러시대의 유적들이 겹쳐있다.

공산성을 돌아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소가 만하루와 연지다.

 

여지도서(輿)》에 따르면, 1754년(조선 영조 30) 충청감사 김시찬()이 공산성 동쪽

연못가에 6칸으로 건립하였다. 박윤원()이 지은 〈만하루기〉에 따르면, 만하루라는 명칭은

중국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 《공산지()》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호서읍지(西)》

에도 만하루가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까지는 존재하였으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에

홍수로 붕괴되어 매몰되었다.

1980년 공산성 내의 유적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만하루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1984년 지금의 누각으로

복원되었으며, 2006년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지금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이며,

옆에 연못도 복원되어 있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과 주위의 기단석() 디딤돌 등은 원형대로

이용하고, 건물은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보통의 누정()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강학()을

목적으로 건립된 데 비하여 만하루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을 중심으로 하고 경승 관람을 겸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소재지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65번지이다.

 

 만하루

 윙에서 내려다 본 만하루와 영지

 만하루에서 건너다본 풍경

 

 

 

 나는 만하루보다 연지가 더 인상깊었는데 이렇게 만든 인공연못을 처음봤기 때문인것 같다.

1982년 12월 31일 충청남도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공주 공산성(사적 12) 내 남쪽 영은사() 앞에 있는 연못터로 1982년부터 2년간 공주대학교(당시의 공주사범대학)에서 발굴하여 유적지임을 확인하였다. 단을 둔 석축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동서 양축에 넓은 통로를 둔 것이 특징이다. 동서가 긴 평면 직사각형으로 규모는 최대 길이가 21m, 너비는 약 12m이다.

호안석축은 단을 두어 전체적으로 위를 넓게 하고 아래를 좁게 쌓아 9층 석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형태와 흡사하다. 서쪽 호안이 남쪽으로 접한 곳에는 다듬은 돌 2개씩을 포개 쌓아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 통로를 두었다. 이 통로를 통하면 연지의 바닥까지 출입할 수 있다. 바닥은 판석으로 깔았고 동서 9m, 남북 4m 규모이다. 연지 둘레의 동서 벽에서 북쪽 금강변 호안으로 너비 40㎝의 배수로가 설치되었고 현재도 석루두()가 남아 있다.

이 연지의 북쪽과 금강 호안 사이의 대지에서 정면 4개, 측면 3개의 8각 고주가 발굴되었는데, 측면 중앙에 누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승가대석()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각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는 이 연지는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아주 독특하고 복잡한 모양의 연못이다.

 

 영은사

전하는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때에 이 절에 총본부를 두고 군대를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번번이 왜적과 대전하여 격파하니 군대의 사기는 충천할 듯하였다. 적군이 몰려올라 치면 의례히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 모든 계락을 일러주곤 하였다.

하루는 총사령관이 바뀌자 사내 군인들의 공기가 뒤숭숭하였다. 전 사령관을 흠모하는 사병들이 신임 사령관을 불신임하는 기세까지 보이자, 사령관은 주모자를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자 사령관은 밤마다 꿈자리가 사나웠다. 어느 날 사형당한 사병이 꿈에 나타나 사죄하면서 살아서 지은 죄의 대가로 왜적이 공격해오면 전야에 미리 현몽하여 알려주겠노라고 말했다.

신임 사령관은 고마움을 표하고 경솔히 사병을 처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자, 명일 서방 쪽에서 왜적이 대거 습격할 것이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다음 날 전 군대를 동원하여 꿈에 지시한 장소를 포진하고 왜적을 대기하고 있다가 예기치 않은 반대 방향에서 적군이 몰려와 아군은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그날 밤 산신령이 나타나 원혼의 현몽을 믿지 말고, 나의 계시대로 응하면 절대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틀 후 왜적이 남쪽에서 침입하여 절을 포위해올 것이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전했다. 사령관은 형식적인 대답을 하고는 믿지 않았다가 또다시 아군의 많은 수가 죽었다. 산신령이 노기를 띠고 꿈에 나타나자 사령관은 백배사죄하고 이후로 산신령의 지시를 따르자 언제나 승리하였다. 그 후로 이절에는 신령님이 숨어 있어서 언제나 아군에 유리한 계시를 준다 하여 절 이름을 영은사라 부르게 되었다.

 

 

 

 

 

 

 

 

 

 

 

500년(동성왕 22) 봄에 왕경인 웅진(熊津)의 궁성 동쪽에 세웠다. 높이는 5장(丈)이었으며, 연못을 파고 기이한 금수를 길렀다. 이에 간신이 반대의 상소를 올렸으나 동성왕(東城王)은 듣지 아니하고, 또 간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궁문을 닫아버렸다.

임류각의 위치에 대하여서는 한때는 공산성(公山城)과 그 동쪽에 솟아 있는 여왕봉(女王峰)과의 경계선상으로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것 같다.

오히려 최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공산성의 동쪽 최고지대인 광복루(光復樓) 서쪽 구릉 아래에 있는 광장 북쪽의 약간 두드러진 곳에서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 곳이 임류각지로 추정되었다.

 

 

공산성 공북루 아래에 자리한 한채의 비각안에 3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들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 공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을 왜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준 명나라 세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원래 선조 32년(1599) 금강변에 처음 세웠다가 홍수로 매몰되어 숙종 때에 다시 세워둔 것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왜구(倭寇)’등의 글자가 훼손되었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아무렇게나 매몰되었던 것을 광복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산성 안에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으나 광복 이후 8·15해방을 기리는 뜻으로 광복루라 불렀다.
광복루는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이라 불렀는데, 1946년에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이 이곳에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모든 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왼쪽에는 오르내릴 수 있도록 층계를 만들어 두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