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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공주]백제시대 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역사를 간직한 공산성 3

by 柔淡 2011. 12. 25.

공산성은 길이 2,7km의 좁은 구역이지만 백제시대부터 현재까지 1600년동안이나 각시대를 거치며

중첩되어 쌓여온 역사가 무척이나 많은곳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곳은 백제의 왕궁터였는데 백제가 멸망시 의자왕이 마지막으로 피신했던 곳이자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잠시 피신해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천년넘게 내려온 역사에서 백제의 왕과 조선시대의 왕이 같은장소에 피난을 했다는게 참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지난 10월에 여기서 전설로만 전해지던 옻칠된 인갑과 마갑이 출토되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국민일보 인용

백제 웅진시대(476∼538)의 도읍지였던 충남 공주시 공산성 성안마을에서 사람과 말의 가죽 갑옷이

잇따라 출토돼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공주대박물관이 최근 이곳의 저수시설에

대한 조사 결과 서기 645년을 지칭하는 ‘貞觀十九年’(정관19년)이라는 글자가 적힌 찰갑(刹甲·비늘 모양 갑옷)

 한 벌을 발굴했답니다.

1000여개의 비늘 모양 가죽으로 이뤄진 갑옷에는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행정관19년4월21일)

 ‘王武監’(왕무감) ‘大口典’(대구전) ‘○○緖’(서) ‘李○銀○’(이○은○) 등의 붉은색 글씨(○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는군요. 이 가운데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로, 이 갑옷이 백제 멸망(660년) 전인 645년

(의자왕 5년)에 제작됐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갑옷은 옻칠이 돼 있다는 점에서 옛 문헌에 기록된 백제시대 갑옷인 ‘명광개’(明光鎧)임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명광개란 황칠(黃漆·황색 옻칠)을 한 갑옷으로 그 광채가 상대방의 눈을 부시게 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에는 “사신을 당나라로 파견해 명광개를 바치려 했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기록돼 있지요.

문헌으로만 전하던 백제시대의 전설적인 갑옷인 명광개 실물이 14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데 이어 공산성의

같은 구역 바로 아래에서 가죽에다 옻칠을 해서 만든 말 갑옷인 마갑(馬甲)이 발굴됐습니다. 이 마갑 비늘

조각은 각각 길이 12∼18㎝ 안팎이며  2m 안팎의 범위 안에서 두 줄로 나란히, 그리고 상하 네 겹을 이룬 상태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마갑 자체는 물론이고 마갑 중에서 옻칠한 가죽 갑옷은 백제지역에서는 처음 출토된 것이랍니다. 출토 상태로

보아 이 갑옷은 말의 등을 덮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갑 외에도 큰 쇠칼인 대도(大刀)와 장식용 중간 크기 칼인

장식도(裝飾刀)가 나왔답니다. 대도는 장식이 없지만 길이 55㎝ 안팎인 장식도에서는 은 장식과 함께 특히 손잡이

부분에 금장이 발견됐지요.

이들 칼은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신라에서는 경주 금관총에서, 백제에서는 공주 송산리 고분에서 비슷한

형태가 출토된 적이 있답니다. 갑옷과 함께 출토된 칼이 한반도산이 분명해 글자가 있는 갑옷이 당나라 유물일

수도 있다는 학계 일각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갑옷의 주인은 누구이며 어떤 이유로 이곳에 묻혔을까요.

갑옷과 함께 출토된 유물로 보아 일반인은 아니고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장렬한 싸움 끝에 전사한

장수의 것일 수도 있고,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쫓겨 웅진으로 피신했으나 적에게 붙잡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얘기도 전하니 그의 갑옷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조선시대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신했던 쌍수정

 

 

 영동루

 

 

 

 진남루

 

 

 

 딱따구리 한마리가 나무기둥에 열심히 둥지를 파고있다.

 

 

 백제시대 왕궁터 

 

 

 

 

 

 

 

 

 

 

 한바퀴돌아 다시 금서루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