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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부여]백제의 마지막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 부소산성 2 - 낙화암

by 柔淡 2012. 7. 15.

군창지를 지나면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주거양식이었던 수혈식 주거지 유적이 나온다.

거기를 지나면 달이뜨고 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반월루가 나오는데 루에 오르면 부여 시가지와 백마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다시 한참을 가면 연리지나무가 하나있고 낙화암이 나온다.

부소산성의 일부인 낙화암은 그 비극적인 역사로 인해 오히려 부소산성보다 더 잘 알려져 있다.

 

낙화암 소개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분명하다.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勇談)이 많은 영주(英主)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聲勢)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

(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成忠)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金庾信) 등의 영주와 명신(名臣)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은 4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黃山)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孝)를 데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붉은 글씨로 새겨진 낙화암. 백마강 유람선에서 바라본 풍경 

 

 부소산성 수혈식 주거지 전시관

 

 

 

 

 

 

 

 반월루

 

 

 

 

 부여 시가지

 백마강

 

 백제 왕자드르이 산책로

 

 

 

 연리지

 

 낙화암 입구

 낙화암 위의 정자 백화정

 

 

 백마강, 위쪽으로 백제보가 있다.

 

 

 

 

 

 

 낙화암

이제 고란사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