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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영양]조선시대 민가의 아름답고 대표적인 연못, 서석지와 주일재

by 柔淡 2012. 8. 6.

영양시장 경상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찾아간 곳은 서석지라는 연못이다.

영양에 오면 제일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이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선생이 경정(敬亭) 앞에 만든 조선시대

민가(民家)의 대표적인 연못[池塘]이다. 선생은 1577(선조10年)에 예천 용궁에서 출생하여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선생이 우산(愚山)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수업하여 경학(經學)의 지결(旨訣)을 배웠다. 선생은 성리학과

시(詩)에 능하였고, 1605년(선조38年)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608년 이후 광해군 때 세상이 어지러워

지자 이곳에서 학문 연구로 일생을 마쳤다. 그 후 1627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세상이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1636년(仁祖14年) 병자호란이 끝나자 선생은 넷째아들인 임천 제(臨川 悌)를 데리고 자양산(紫陽山) 남쪽 기슭인

이곳(진보의 임천, 현재 입암면 연당 1동)에서 살았다 한다

 

선생은 서쪽의 구릉 하에 흰 돌이 서있는 곳에 못을 파고 서석지라 이름을 짓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좌우로

주일재(主一齋)와 운서헌(雲棲軒)을 두고 경정(敬亭)이라 일컫었다. 이 정자는 자손들이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건물이 방박하고 사방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난간을 돌렸으며 좌편에 서실 두 칸을 별도로 개축 하였으니 주일제라

 말한다. 못 가운데는 부용화(연화)가 있어 여름에는 정자위로 향기를 풍기며 꽃을 구경할 만하다. 그리고 정자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경관을 더욱 좋게 하며 경정의 역사(현재 수령이 400살이 넘었다)를 말하여 준다.

마루 위에는 정기(亭記), 중수기(重修記) 경정운(敬亭韻) 등 당시의 대명절의로 이름난 명사들의 시가 이 걸려 있다.

이 마을에는 선생의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1979년 12월 28일 중요민속자료 10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 서석지는 1982년 2월 20일 서울 산림청 임업시험장 강당에서『한국정원문화연구회』주체로 열린『서석지

학술연구발표회』에서 문화재 전문위원 민경현(閔庚玹)씨가 이 정원(庭苑)이 갖는 독특한 양식과 조경술(造景術)등을

분석 평가하여 국내외에 널리 소개 하였다.

 

시흥 관곡지가 1466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연곷을 심은 연못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서석지는 1613년에 만들어졌으니

약 147년 뒤에 만들어진 것이다.

 

서석지의 연꽃

서석지의 또 다른 상징 ,수령400년의 은행나무

 

 

오른족이 서석지 담장이다

 

 

 

서석지와 경정

별당 서하헌

서석지 배치도

 

 

 

서하헌 편액

 

경정 편액

정기(亭記), 중수기(重修記) 경정운(敬亭韻) 등 당시의 대명절의로 이름난 명사들의 시가 이 걸려 있다

 

 

 

 

아름다운 대들보

 

 

경정에서 내려다본 서석지

 

 

 

 

 

 

경정 뒤쪽의 자양재

장판각

서석지의 연꽃들

 

 

 

서석지에서 올려다 본 경정

서석지 안에 놓여있는 돌들.

 

 

 

 

 

 

연못은 수려한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하였으며, 방지(方池)의 북단에 있는 3칸 서재인 주일재(主一齋)는 ‘雲棲軒(운서헌)’이라 편액하였다.

서단에는 6칸 대청과 2칸 온돌이 있는 규모가 큰 정자인 경정(敬亭)을 세우고 경정의 뒤편에는 수직사(守直舍) 두 채를 두어 연못을 중심으로 한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북단의 서재 앞에는 못 안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四友壇)을 축성하여 송ㆍ죽ㆍ매ㆍ국을 심었다.

연못은 동서로 길며, 가운데에 돌출한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을 이루고 있다. 연못의 석벽은 그 구축법이 매우 가지런하고 깔끔하다. 동북 귀퉁이에는 산쪽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내었고, 그 대각점이 되는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마련하였다.

 

이 연못의 이름은 연못 안에 솟은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한다. 서석군은 연못바닥을 형성하는 크고 작은 암반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 있는 것으로 그 돌

하나하나에 모두 명칭이 붙어 있다.

돌들의 이름은 선유석(仙遊石)ㆍ통진교(通眞橋)ㆍ희접암(戱蝶巖)ㆍ어상석(魚狀石)ㆍ옥성대(玉成臺)ㆍ조천촉(調天燭)ㆍ낙성석(落星石) 등이며 20여개에 이른다.

이러한 명칭은 정영방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옛 조상들은 나무뿌리 하나, 돌 한점에도 자신의 학문과 인생관에 맞는 이름을 부여하고 자신을 수양했던 것이다.

그리고 만들어 진지 꼭 400년이 지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서석지의 아름다움과 그걸 지금껏 보존해 오고 있는 후손들의 노력에도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며 경건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