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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봉화]지은지 500년이 넘는 고택 거촌리 쌍벽당 경추 김두순님을 만나다.

by 柔淡 2012. 8. 3.

은어축제장을 벗어나 봉화에서의 마지막 목적지 거촌리 쌍벽당을 찾아간다.

쌍벽당(雙碧堂)은 연산군 때의 성리학자인 쌍벽당(雙碧堂) 김언구(金彦球)를 기리기 위해 1566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안채는 김언구(金彦球)의 부친인 죽헌(竹軒) 김균(金筠)이 1450년에 건립하였다 한다.
안채가1450년에 처음 지었으니 정확하게 562년이 지났다.

봉화에 와보니 유난히 조선시대의 사화와 정쟁을 피해 은거한 양반들이 많고 그 후손들이 조상들이 지은 고택을

지금까지 잘 보존해서 실제로 살고있는 고택들도 많이 있다.

 
쌍벽당(雙碧堂) 김언구(金彦球)는 조선 연산군조인(燕山君朝人)으로 그의 부친 습독공(習讀公) 김균(金筠)이

풍산(豊山)의 구담(九潭)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터전을 잡았으며 생원공(生員公) 김언구는 부귀영화를 멀리

하고 뜰에 솔과 대나무를 심으며 거문고를 즐겼는데 호는 송죽(松竹)이라 하였다.

별당(別堂)에 걸려있는 쌍벽당 중수기(重修記)에 보면 정종(正宗)을 지낸 홍공(洪公)이라는 이가 쓴 편액

(扁額)에는 건물의 창건년대(創建年代)가 가청병인(嘉請丙寅)(1566년)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하며, 1864년

토사공(土舍公)이 남익(南翼) 3칸을 수선(修繕)하였고, 1892년 그의 손자 용정(容正)이 안채를 크게 수리하면서

외당(外堂)을 별도로 세웠다고 하였으니 지금 쌍벽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별당은 이때 건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가옥은 10여호의 민가가 집락을 이루고 있는 완만한 경사지의 뒤편에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넓게

터를 잡았다. 행랑채에 우뚝솟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의 안채와 우측 별당의 정면이 보이고, 별당의 후방에

방형(方形)으로 담을 쌓아서 사당(祠堂)을 배치하였다.

ㅁ자형의 안채(정침(正寢))는 앞채의 좌우로 양익(兩翼)이 1칸씩 돌출하였다. 중문간(中門間) 우측에 툇마루와

2칸통(間通)의 사랑윗방 그리고 우단(右端)에 전면이 개방된 마루 1칸을 배치하고 사랑웃방 뒤에 사랑아랫방

단칸(單間)을 설치하여 사랑부분을 구성하였으며, 중문간 좌측에는 고방 1칸과 2칸통 아랫방을 배치하여 ㅁ자집의

앞채를 이루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이르는데, 정면 3칸의 대청이 안마당폭 가득히 안채의 중앙에 자리잡았다. 이 안채의

대청은 낮은 잡석기단위에 있지만 큼직한 자연석 초석위에 주택에서는 보기드문 굵고 높은 원주(圓柱)를 사용하고

있어 지붕이 매우 높고 웅장하게 보인다. 대청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상부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로 종보

위에 키가 높은 제형(梯形) 판대공(板臺工)을 세워 놓았다. 대청의 좌측에는 도장방과 안방이, 우측에는 고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서 경북지방의 고식(古式)을 보이고 있으며 중수기(重修記)에 1892년의 수리시 창호를

모두 새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대청 뒷벽의 양개(兩開)널문에 중간설주를 세운 형식이 그대로 유존(遺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구제(舊制)를 잘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별당은 정면 4칸의 전면에 헌함을 설치하였으며 좌측 1칸은 통칸(通間) 온돌로 꾸미고 나머지 3칸은 전면이 개방된

대청이다. 잡석기단 위에 거칠게 다듬은 초석을 놓아 방주(方柱)를 세웠고 우물마루를 깐 대청 상부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로 종보위에 파련대공을 올려 놓고 윗몸에 첨차를 끼워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다.
행랑채는 솟을대문의 우측에 고방과 방이 각 1칸씩 설치되었고 좌측에는 고방 2칸과 방 및 부엌이 각각 1칸씩 배치되었다.

본 가옥은 조선 초기말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측되며 후대에 양차(兩次)에 걸쳐 중수를 하였으나 평면과 구조의 중요부는

비교적 구제를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조선시대 주택연구의 자료가 될 유구로 생각된다.

 

쌍벽당 전경과 구조도는 한국학 중앙연구원 사진을 가져왔다 

 

 ㅁ자의 우측부분

 대청

 수백년된 기둥을 못을 쓰지않고 연결했다. 

 

 안채

쌍벽당의 종손이자 현재 고택을 관리하시는 경추 김두순옹이 친절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원래 꽃잔디를 깔았으나 그게 한옥 고택과 어룰리지 않는다는 조언을 받고 전부걷어내고 마사토를 깔아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짐을 하다가 팔을 다치셨고 한옥을 관리하는게 쉬운일이 아이라고 강조하신다.

 안채의 바깥부분

 꽃잔디를 걷어내고 마사토로 다진 뒷마당.

 밖에서 들여다 본 안채 

 안채와 사랑채 사이 통로

 멀리 전봇대 아래 사당은 별도로 있다고 한다.

 원래 담장이 있던곳인데 중문을 달았다고 한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문짝하나 마음대로 고체하지 못한다는데 마당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차량이 드나들수 있어야 하기에 새로 중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당

작년7월 9일에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는 밤에 도둑이 들어 사당에 보관 중이던 감실(監室·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 2점과 제상(祭床) 1점을 훔쳐갔다.

지난 2000년과 2003년에도 도둑이 들어 보관 중이던 《갈암집》, 《충재집》, 《퇴계선생언행록》 등 고서 400여 점을 도난당했는데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돈이 된다고 해도 남의 조상님 제기를 훔쳐가다니....

 

 

 사랑채인 쌍벽당

 

 

 

 

 

 대들보와 용마루. 목재의 무늬가 참 아름답다.

 

 

 

 

 

 

 

 

 

 

 

 

 

이날 종손이신 경추 김두순옹께 많은 말씀을 들었는데 이분의 일생은 이 고택을 관리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살아온신것 같다.

45년간 교육자로 생활 하시다가 은퇴하셨는데 고택을 관리하기 위해 봉화땅을 떠나신 적이 없다고 하신다.

지금도 자손들은 전부 외지에서 사시고 부인과 함게 두분이 이 넓은 저택을 쓸고닦고 계신다.

그런데 이고택이 지은지 562년이 지난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고택이라고 자부심이 대단 하셨다. 

한집안의 종손으로 살아 가신다는게 보통일이 아니다. 지난번 논산 명재 윤증고택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종손과 대화를 나눴다고

말씀드렸더니 윤증고택의 종손 윤완식씨와도 잘 아신다고 하신다.  

 

전국 각지의 고택들은 이처럼 조상의 유적을 지키기 위해 말없이 희생하시는 분들이 있기에 지금처럼 관리되고 있는것 같다.

그나마 고택체험이라도 하면 수입은 나아지는데 그 또한 관리하고 유지하는데 쉬운일은 아니어서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이제 이분들의 세대가 지나면 수많은 고택들은 어찌 될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