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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익산]익산이 백제의 고도임을 보여주는 왕궁리석탑과 고도리석불

by 柔淡 2012. 12. 24.

보석박물관에서 나와 왕궁리 유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난 2009년 11월에도 왔었는데 그때는 한참 복원공사중이었다. http://blog.daum.net/j68021/13744539 참조

 

이제 완전히 복원이 되어 깔끔한 모습을 자랑한다.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왕금마을 뒷산 구릉지대를 지역 주민들은 ‘모질메’라고 부르는데, 이 곳은 예로부터 마한

혹은 백제의 궁궐자리로 알려진 곳이다. 위치는 금마산에서 남으로 약 3km쯤 떨어져 야트막하게 전주행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는 대지이다.

이 성은 구릉지를 일부 깎아내리고 주변은 흙으로 쌓아올려 세단으로 나누어 평지를 조성하고 그 안에 건물을 배치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명‘왕궁평성’,‘왕궁리토성’ 이라고 불리는 이 성은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결과 남북의 길이는 약 450m, 동서의 폭이 약 230m의 반듯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성은 일반적인 담장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큰 폭이 약 3.2m정도의 궁궐 성벽이 일부 노출되어 백제의 궁성지로서의

가능성이 한층 커지고 있다. 그리고 성의 축조기법이 백제양식이었으며, 백제시대의 기와 및 와당을 비롯하여 토기,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고 있어 이 성(城)이 지닌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성은 역사적으로 백제 무왕의 천도 혹은

별도지로서 운영된 궁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보덕국, 안승의 궁성, 그리고 후백제 견훤이 잠시 궁성

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유적이다.
현재 왕궁평성내에는 1997년 1월 1일로 국보 289호로 지정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과 주춧돌, 백제 시대의 정원석으로 보이는 관상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인근지역에 익산 미륵사지가 9.6 ㎞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석탑은 왕궁평성 중앙의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왕궁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높이 8.5m의 장중한 탑으로 1965년 해체보수되기 전까지만 해도 토단(土壇)을 갖춘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해체복원 결과 원래 돌로 기단(基壇)을 구성하였음이 밝혀져 이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 탑의 구조를 보면 기단부는 기단 면석의 각 면이 2개의 탱주(撐柱)와 우주(隅柱)가 조각된 3매의 돌로 깎아 맞추었으며, 하대 갑석 또한 1면을 3매의 돌로 쌓았다.
  탑신부에 있어서 초층 몸돌은 각 면의 중앙에 1개의 탱주와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하였으며 전부 8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지붕돌은 층급 받침이 3단인데 지붕과는 별도로 4매의 돌로 조성하여 그 위에 지붕돌을 얹졌는데 지붕돌은 평평한 모습을 보이며 네 귀에서 가볍게 들리어 있어 전형적인 백제계의 석탑이라고 하겠다.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그리고, 부서진 보륜(寶輪) 1개가 남아있다. 1965년 해체 보수 중 제 1층 지붕돌의 중앙과 심초석(心礎石)에서 각각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지붕돌에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석재는 백제시대 주춧돌으로 사용한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좌우 두 곳에 4각형의 홈( 凹 )을 만들고, 뚜껑이 있는 금동제 함을 각각 장치하였다. 동쪽 금동제 함 속에는 금으로 된 뚜껑이 있는 네모꼴의 함이 들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다시 금으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를 갖추고 연꽃형 뚜껑을 갖춘 녹색유리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서쪽 역시 금으로 된 뚜껑 있는 네모꼴의 함 안에서 금강경판(金剛經)이 발견되었다.
  기단부의 심초석(心礎石)에 설치된 사리공은 ‘品’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쪽 구멍에는 배 모양의 광배(舟形)를 갖춘 청동여래입상과 청동방울이 들어 있었다. 북쪽 구멍에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 당하였다. 이들 금강경판 등의 사리장치는 국보 123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 사리장치는 “관세음응험기”의 제석사지 화재기록에서 나오는 사리장치들과 내용이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탑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시대 설과 통일신라 설, 그리고 고려 초기 설이 대립되어 주장 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굴결과 탑의 하부(下部)에서 다져쌓기로 조성된 건물지 흔적이 발견되어 석탑의 조성 연대는 백제시대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왕궁리 유적지에 가기전에 고도리라는 곳에 특이한 석조여래입상 두기가 서있다.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남쪽으로 10리쯤으로 떨어진 들판에 금마를 남류하는 옥룡천(玉龍川)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약 200m 떨어진 마주 보며 서있는 두 기의 석인상이 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인석(人石)’이라 부르고 있다. 이 두 기의 석인상은 하나의 석주(石柱)에 머리부분부터 석좌(石座)까지 조각하였다. 석상의 머리위에는 높은 관을 얹었으며, 얼굴은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가느다란 입술이 인상적인 모습이다. 어깨는 그대로 흘러내려 아주 좁게 처리하고 있다. 양팔은 복부 앞에서 손가락을 끼고 있으나 옷으로 가리워졌고, 옷의 문양은 목에서부터 평행선으로 흘러내려 양쪽 발등위에서 좌우로 벌어졌다. 석좌는 앞쪽을 깎아 모를 내었고 발등은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이 석상은 넘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철종 9년(1858)에 익산군수로 부임한 황종석(黃鍾奭)이 다시 세우고 ‘군남 석불중건기(郡南 石佛重建記)’의 비문을 남겼다. 그가 이 비문에서 “이 석불을 불상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에 불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석불중건기에는 “금마는 익산구읍의 자리인데 동․서․북의 3면이 다 산으로 가로 막혀 있다 그런데 유독 남쪽만이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虛虛)하게 생겼기에 읍의 수문(水門)의 허(虛)함을 막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금마의 주산(主山)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은데, 말에게는 마부가 있어야한다고 하여 마부로서 이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금마산을 마이산(馬耳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석상은 서쪽의 석상은 남자이고, 동쪽의 석상은 여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 두 석상 사이로 옥룡천(玉龍川)이 흐르기 때문에 이 둘은 평시에는 떨어져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 냇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두 석상이 서로 건너와서 끌어안고 그동안 맺혔던 회포를 풀다가 새벽에 닭이 울면 헤어져서 다시 제자리에 가 선다고 한다.

 

 

 

 

 

 

 

 

 

 

 

 

멀리 미륵사지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