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광주·전라

[전주]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by 柔淡 2013. 4. 24.

전동성당을 나와 바로 길건너편에 있는 경기전으로 간다.

한옥마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곳이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이성계의

지취와 흔적이 남아있는 이목대, 오목대다. 그중 이목대와 오목대는 한옥마을 끝부분 언덕위에 있어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경기전은 한옥마을 입구에 있어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유적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 창건되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보물 제931호인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등의 유적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진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으며 현재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한옥마을을 찾은 여행객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으로,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모사본 대신 별도로 보관 중인 태조 어진을 제자리에 모시기를 희망하는 전주시민의 바람이 크다.

 

봄을 맞아 입구도 꽃단장을 했다.

예전에는 안보이던 수문장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마비

 

 

 

몇번 왔어도 그대로 지나친 경기전 본전 좌측의 부속건물로 간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이곳에 자식들을 위한 소학교를 세웠는데 그학교를 경기전 뒤쪽으로 옮기고 복원했다.

 

 각종 체험을 할수있다.

 

 

 

 옛날 우물

 본전의 옆모습

 이제 다시 경기전 본전으로 간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으로 본전이라고도 하며 태종10년(1410년)에 세웠다. 경기전은 정유재란때 불탔으나 광해군 6년(161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랑을 두어 최고의 사당임을 나타냈다.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 기능과 품위에 기준한 엄격한 격식, 그리고 정전과 배례청 평면 조합 및

어방구조 등이 보물로서 문화재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8년 12월 국가보물 로 지정됐다.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며 견고하고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기법이 잘 전수된 안정된 구조와 부재의 조형 비례는 건축적 품위를 돋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丁’자형 돌출된 배향공간 정면을 보면 거북이 두 마리가 있다. 아쉽게도 한 마리는 목이 잘려 나갔지만 형상으로 보아 하마비처럼 한 쌍으로 조각되어져 있다.

경기전을 지은 목공이 물에 살면서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을 통해 목조건물인 경기전이 화마(火魔)를 피하고 조선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암수 한쌍의 거북이를 새겨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기전 입구에서부터 말에서 내리는 곳임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외신문, 내신문 그리고 초상화를 모신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 사당임을 감안할 때 신문(神門)이라고 호칭되며 홍살문 안쪽 내․외신문의 세 문을 통과할 땐 ‘동입서출’, 다시 말해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 으로 나가야 한다. 가운데는 태조의 혼령이 드나드는 ‘신도(神道)’이기 때문이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조각한 거북이, 소박하고 귀엽다.

 

 

 경기전 정전에 봉안되어 있는 어진은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이다. 경주, 평양 등지에 봉안했던 여타의 어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현재의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기존의 낡은 어진을 불태워 묻고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태조어진을 이모(移模 : 새로이 하나만을 제작하고 원본은 불태워서 묻는 경우)한 것이다. 임금이 정사를 돌볼 때 차려입고 곤룡포에 익선관을 쓴

모습이다. 얼굴과 옷 주름을 처리한 음영기법, 의자와 자리의 화려한 색체, 어깨에 그린 용의 금박효과 등에서 높은 품격이 엿보인다. 한 왕조를

세운 인품과 위엄이 시대를 뛰어 넘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능소화와 잣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전주사고

1445년(세종 27) 처음 전주에 실록들을 봉안할 때, 부(府)의 성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1464년(세조 10) 가을에 진남루(鎭南樓)로 이안(移安)하였다.

당시 세조는 전라도에 명해 실록각을 건립하도록 했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미루었다.

1472년(성종 3) 봄, 세조·예종 양조의 실록이 만들어지자 성종은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奉安使)로 삼아 이를 전주사고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때 춘추관의

구신(舊臣)이었던 김지경(金之慶)이 이곳 관찰사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실록각을 건립하고자, 양성지와 더불어 경기전의 동편에 자리를 잡고 계(啓)를 올렸다.

이에 이웃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00명을 역군(役軍)으로, 전주부윤 조근(趙瑾)을 공역(工役) 책임자로, 순창군수 김극련(金克鍊)은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여 1473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실록각이 완성되자 그해 6월 진남루에 봉안하고 있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 뒤 120년간 실록과 기타 서적이 잘 보관되어 내려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에 소실될 위험이 있었다.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보현사의 전주사고본 실록을 다시 영변의 객사로 옮겨두었고, 1603년 5월에는 등서(謄書)와 재인(再印)의 편의를 위해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임란 후, 전주사고본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재 인쇄된 4질을 합한 5질의 실록을 봉안하기 위한 5사고가 정비되나 전주사고는 계승 복구되지 못하였다.

 

 전주사고지 바로 옆의 청매실 나무

 이 매실나무에 청매화 꽃이 피는데 이 사진은 2009년 3월초에 찍은것이다.

 홍매화도 피어난다

 

 경기전의 대숲

 

 예종 태실비

 

 

 태실비앞의 거북과 용의 코가 다 없어졌다. 가루를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때문

 

 

 

 

가을에는 큰나무의 단풍과 낙엽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