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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제천]의상대사와 소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는 무암사

by 柔淡 2014. 6. 19.

 덕주사를 돌아보고 약속시간에 맞춰 제천 시내로 돌아가는길 레이크호텔과 힐탐호텔을 지나서 우측에  성내리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충주댐으로 이곳 청풍과 금성의 일부가 수몰되기전인 고교시절  이곳에 사는 친구들이 많아

자주 왔던 동네다. 갑자기 옛추억이 생각나 들어가 보기로 한다.

40년전인 고교시절에는 시내버스에서 내려 한시간 정도 걸어가야 했는데 지금은 절아래까지 포장이 되어있다.

 

 

자네 짐싸게!

고교시절 악동친구들이 10여명 있었는데 그중 한친구가 아버님과 스님과의 인연으로 여름방학 한달동안 이곳 무암사에

공부를 하러 와 있었다. 그 친구 위문을 한다는 핑게로 친구 몇명이서 무암사를 찾아가서 공부 잘하고 있는 친구를 불러내

계곡에서 시끌벅쩍하게 놀고 돌아왔는데 나중에 그 친구에게 들으니 스님께 불려가서 심하게 야단맞고 쫏겨날뻔 했단다.

고등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얼마나 시끄럽게 놀았으면.... ㅎㅎㅎ

지금도 그친구를 만나면  "자네 짐싸게" 하면서 웃어대곤 한다. 그랬던 친구들이 이제 내년이면 환갑이니 세월참 빠르다. 

 

40년만에 다시와보는 무암사!

단청을 새로 하고 새로지은 건물도 한채 있지만 옛기억이 그대로 난다.

 

무암사 소개

제천에서 82번 지방도를 따라 청풍방면으로 18㎞를 가면 좌측의 도로변에 금성면 성내리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마치 상쾌한 풍광을 느끼며 계곡의 좌편으로 까치성산이, 우편으로 동산이 길게 능선을 드리우고 있는 깊은

품안에 무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확한 창건 연대와 창건자는 알 수 없으며, 조선시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에서 서남쪽 위치에 암봉이 하나 있는데

늙은 스님을 닮았다 하여 노장암(老丈巖)이라 불린다. 이 암봉이 안개가 드리워졌을 때에만 보인다 하여 무암사라고 한다. 풍수설에

따르면 절 입구에 중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으면 그 절의 사맥(寺脈)이 끊기지 않고 식량도 넉넉하다고 한다.

사찰 지붕의 망와(望瓦)를 살펴보면 조선시대인 1740년(영조 16)에 중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 칠성각, 산신각, 요사채, 객실, 수호실 등이 있으며, 극락전에는 목조아미타불좌상과 후불탱화(後佛幀畵), 지장탱화(地藏幀畵)가 보존되어 있다.

부도 4기와 불기류, 촉대와 위패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4기의 부도 중 수월당(水月堂) 부도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1959년에

발견되었다. 특히 우부도(牛浮屠)는 창건 당시 목재와 기와 등을 운반하던 소가 죽자 그 사리를 모아 세운 사리탑으로 이 주변을

소부도골이라 한다.

또한 대웅전 전면의 기둥은 수령 1,200년을 넘는 싸리나무의 기둥이라 하여 보존 가치가 높다. 절 건너편에는 큰 암석이 있는데 청명한 날씨에는 산과 암석이 일체로 보여 바위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나 운무가 산을 덮으면 암석이 뚜렷하게 보일 뿐 아니라 노승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무암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죽은 소에서 나온 사리를 보관하고 있는 부도*
무암사에는 2개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한 개가 소의 부도로 죽은 소에서 나온 사리를 보관하고 있어 유명하다. 또한 부도에는 의상대사와 소에 대한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의상대사가 무림사를 세우려고 아름드리 나무를 잘라 다듬어 힘겹게 나르고 있을 때 어디

선가 소 한 마리가 나타나 목재를 운반하여 주었다. 그 덕에 손쉽게 절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소를 극진히 위해 주었으나 얼마 뒤 소가

죽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화장을 하였더니 여러 개의 사리가 나왔다. 소의 불심에 감동한 대사는 사리탑을 세우고 사람들은 무림사

를 우암사(牛岩寺)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