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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포르투갈·스페인·남프랑스

스포남프 049 - 1129 스페인,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 끝에 있는 콜럼부스 동상

by 柔淡 2016. 12. 27.

1km정도되는 람블라스거리 끝부분으로 가보니 높다란 콜럼부스 동상이 있고 거기서 좀더 가면 바다가 나온다.

콜럼부스의 동상이 이곳 바르셀로나에 있는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콜럼부스는 대항해시대에 제일먼저 포르투갈에가서 엔리케 항해왕자에게 인도로가는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에스파니아로 와서 이사벨 여왕에게서 가까스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이름은 영어식 표기이며 실제 그의 이름이 이렇게 불렸을 가능성은 없다. 이탈리아명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하였고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지만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전해진다. 1479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484년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1486년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건너가 후원자를 찾았다. 그는 에스파냐 카스티야 왕조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 그의 대담한 항해계획을 설명하였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왕실에서 거절하여 그의 항해계획이 또 실패하였다. 그는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에 재차 후원을 요청하였다가 번번이 거절만 당하였다. 그의 집요한 노력으로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아내었다.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아라곤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 여왕이 마침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가 제시한 계약 조건을 승인하였는데 계약내용은 ‘콜럼버스는 발견한 토지의 부왕()으로 임명될 것이며, 이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은 자손에게 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약을 산타페 협약이라고 부른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로 하여금 선박 2척(핀타호와 니냐호)을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섬(추정)을 발견하였다. 이어,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여, 이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히스파니올라에다 약 40명을 남겨 식민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핀손과 사이가 나빠져,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5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자는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들에게는 공납()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고,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 문책당하였다.


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하구()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쿠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1504년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1506년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54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자기가 발견한 땅을 여전히 인도라고 믿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콜럼버스가 과장되고 오만한 성격을 가졌고 잔인하고 무자비한 면모를 가진 인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콜롬버스가 최초로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서양 사람에 의해 아메리카대륙이 발견된 것은 1000년경 북유럽노르만인()에 의한 것이었다. 콜럼버스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서인도 항로의 발견이며 이로 인하여 아메리카대륙이 유럽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에스파냐 사람에 의한 신대륙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면서 이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아메리카 대륙에는 엄청난 인명살상과 전염병으로 인한 문명파괴 현상을 불러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두산백과)

 

콜럼부스 동상










바르셀로나 해안























  이제 람블라스 거리를 떠나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 근교의 호텔로 하루를 묵으러 간다.

내일은 가우디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구엘공원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