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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경복궁 3 (06. 03. 04)

by 柔淡 2006. 3. 11.

 

근정전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法殿, 正殿)이다. 태조 3년(1394)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서,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근정전"이라는 이름은 태조 3년(1395) 10월 경복궁 창건 당시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으로, "임금의 부지런한 자세가 정치의 으뜸"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왕위 즉위식이나 외국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역대 국왕 가운데 정종(1398년), 세종(1418년), 세조(1455년), 명종(1545년)이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한편 근정전은 조선시대 궁궐의 법전 가운데 유일하게 상월대와 하월대에 난간을 두르고 돌짐승들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갖는 위상을 근정전의 격식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월대의 난간에는 방위신에 해당하는 사방신(四方神)을 동서남북의 방향에 맞게 조각해 놓았고, 상월대와 하월대의 난간 곳곳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과 상서로운 동물(瑞獸)들을 조각해 근정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내부에는 일월오봉병(日月五烽屛)으로 둘러쳐진 어좌가 높은 대 위에 있고 통간으로 높은 천장을 형성하였다. 천장 중앙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쌍룡을 나무로 조각해 매달았다.

정면 5간 측면 5간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건물이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정

근정전 조정의 바닥은 박석(薄石)이라고 부르는 얇은 돌로 되어있다.

이러한 박석은 표면이 거칠게 처리되어있는데, 이에 관한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 추정해 볼 수 있는 이유는 금관조복을 차려입고 행사에 임하면서 가죽신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거친 돌을 깔지 않았나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박석에 반사되는 햇빛을 난반사시켜 상대적으로 눈이 부시지 않으면서도, 기능적으로는 적당한 조명역할을 할 수 있도록 거칠게 돌을 다듬지 않았나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이와 함께 조정에 들어와 임금을 알현할 때, 거친 박석을 밟으며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두루 가다듬게 했던 심리적 효과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정의 중심부분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이는 흥례문에서부터 근정문을 지나 근정전까지 이어주고 있다.

삼도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진 길로, 가운데 높고 넓은 곳이 어도(御道)로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동쪽길은 문관이 서쪽길은 무관이 다녔다. 또한 삼도의 양옆으로는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조정에 참여하는 관원들이 각자 자기 관품에 해당하는 위치에 서게끔 하는 용도로 쓰였던 것이 바로 이 품계석이다.

삼도의 동쪽편에 서는 관원들을 동반(東班) 또는 문반(文班)이라고 하고, 삼도의 서쪽편에 서는 관원을 서반(西班) 또는 무반(武班)이라고 한다. 이 문반과 무반을 가리켜 양반(兩班)이라 했다.

또한 근정전 박석에는 동그란 쇠고리들이 군데군데 박혀있다. 뿐만아니라 근정전 기둥에도 쇠고리들이 박혀 있다. 이 쇠고리들은 조정에서 행사를 치를 때 차일을 치기 위해 줄을 매던 용도로 쓰였다.

 

월대

근정전 상월대와 하월대에 있는 돌짐승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공간과 방위를 상징하는 사방신(四方神)으로,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가 있다. 상월대 계단에 위치하며 각각 방위에 맞춰서 조각되어 있다.

둘째는 시간과 공간을 상징하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이다. 상하월대에 흩어져서 배치되어 있는데 열두띠 동물가운데 용, 개, 돼지는 빠져있다. 특이한 것은 사방신과는 다르게 그 시간적 위치가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서수(瑞獸), 즉 상서로운 동물들이다. 소맷돌이나 상하월대 난간 모퉁이나 돌출 부위에 제각기 자리잡아서 근정전을 지키고 있다. 특히 난간 모퉁이에 새끼를 품고 근정전을 수호하는 부부 돌짐승은 '대를 이어 지켜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앙증맞게 보여주고 있다.

 

 

봉황문

 

한편 월대 기단에 설치된 계단은 전후 중앙에 1개, 좌우 측면에 각 2개를 설치하였다.

전면 기단 중앙에는 답도(踏道)를 두어 그 계단에는 당초문을 새겨 화려하게 장식했고 경사면에는 봉황을 조각하였다. 답도는 '밟는 길'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왕은 가마를 타고 지나갔다.

답도에는 봉황을 새겨 넣었다. 봉황은 상상의 짐승으로 태평성대를 알리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답도에 봉황을 새긴 뜻은 태평성대를 바라는 염원의 표현이자, '선정(善政)을 베푸는 성군(聖君)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근정전 상월대 위 양쪽으로 세 발 달린 향로모양의 청동제 정(鼎)이 있다.

돌로 만들어진 정의 밑받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맨 아래 팔각형모양과 그 위에 둥그런 원모양이 하나의 통돌로 다듬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의 쓰임새와 용도에 대해서는 향로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구체적인 사료에서 그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정의 일차적인 의미는 솥(鼎)을 뜻하지만, 왕권(王權)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국 하(夏)나라 때 우(禹)임금이 전국 아홉 주의 쇠를 모아 솥을 아홉 개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왕권을 상징함과 동시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로 통한다.

한편 대한제국시기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기록사진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정의 뚜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드므

드므란 '입이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궁궐에서 드므는 주요 전각의 월대 모퉁이에 설치하여 그 안에 물을 가득 담아 놓았다. 이는 화마(火魔)가 불을 놓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 올 때, 드므에 담아 놓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 도망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화마는 매우 흉칙하게 생긴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궁궐은 무수히 많은 화재로 인해 전각들이 소실된 기록이 있다. 작은 불이라도 큰 화재로 이어졌음을 볼 때, 드므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아 화재를 경계하고자 했던 상징물'로 풀이된다.

지금은 물을 담아 놓지 않고 나무 혹은 아크릴로 뚜껑을 만들어 덮어놓았다. 일부 몰지각한 관람객들이 드므에 쓰레기를 버리기 때문이다.

 

행각

근정전 마당을 중심으로 동사남북의 사방에 근정전을 감싸면서 대칭으로 둘러져 있다.

남행각은 근정문 동서로 각각 15간씩이며, 북 행각은 사정문을 중앙에 두고 동서로 각각 17간씩이다. 동서행각은 남행각과 북행각 양끝에서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어 각각 44간이다. 북행각을 제외하고 모두 건물 보간 중앙에 기둥이 있는 복랑(複廊)형식이다.

행각의 벽쪽 주춧돌은 네모나고 바깥쪽 주춧돌은 동그란데, 이로 인해 행각시설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벽쪽에는 창고와 사무실을 두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흔적은 근정전 행각의 기둥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행각의 남쪽 끝과 북쪽 끝은 지붕과 기단부를 두 번 꺾어서, 1m50cm정도의 높낮이를 두었다. 이는 배수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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