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경복궁 5 (06. 03. 04)

by 柔淡 2006. 3. 12.

교태전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중궁전(中宮殿)이라고도 하며 강녕전 바로 뒤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에 놓여 있다.

양의문(兩儀門)을 통해 교태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교태전이 왕비의 침전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왕비의 침소 역할이나 혹은 개인적인 용도로만 쓰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에서 왕비가 갖는 지위와 역할은 내외명부(內外命婦)를 총괄하고 왕실의 각종 공식업무 등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교태전은 왕비의 공식 집무실로 봐야 할 것이다.

교태전의 뜻은 주역의 원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즉 태(泰)는 주역의 괘인데 태 괘의 형상은 양을 상징하는 건(乾)이 아래로 가있고, 음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로 가 있는 형상이다.

이는 '하늘로 솟는 양(陽)과 땅으로 가라앉는 음(陰)의 교합으로 생성(生成)한다'는 뜻이다. 음과 양이 화합하고 교통하는 가운데 왕조의 법통을 생산하고 이어주는 공간이 바로 교태전이기 때문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 교태전을 세웠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교태전이 세워진 것은 세종 22년(1440) 무렵으로 추정된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경복궁전도>에서도, 지금과는 다른 교태전의 모습이 보인다. 교태전과 강녕전이 복도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교태전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 재건된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내전에서 대화재가 나자 일제는 이를 "재건한다"는 핑계로 교태전을 포함한 경복궁 내전 일대를 헐어버린다.

이때 교태전도 함께 철거되어,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을 재건하는데 쓰이게 된다. 그 뒤 교태전은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 굴뚝만 남고 버려져 있다가 1995년 다시 복원된다.

한편 교태전도 용마루가 없는 지붕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쓰이는 경우에 용마루가 없는 지붕을 얹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정확한 이유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그 까닭을 알기 어렵다.

다만 속설에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침소에 용마루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이 역시 실증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다. 정면 9간 측면 4간 이익공의 겹처마에 무량각 지붕이다.

 

 

 

 

 

 

 

 

 

아미산

 

교태전 뒤편에는 아미산(峨嵋山)이 조성되어 있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네 개의 단을 쌓은 곳에 꽃나무와 굴뚝, 그리고 석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교태전 후원의 화계(花階)에 해당한다.

원래 아미산(3,092m)은 중국 사천성 아미현에 위치한 중국의 3대 영산(靈山) 가운데 하나다.

뿐만 아니라 아미산은 경치가 빼어나 옛부터 중국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그 아름다움을 칭송해왔다. 이처럼 신령스럽고 아름다운 아미산을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 후원의 화계 이름으로 따온 것이다.

이곳은 경회루 연못을 파서 나온 흙을 인공적으로 쌓아 조성했다고 한다.

그런 아미산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굴뚝이다. 왕비의 침소답게 굴뚝 또한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붉은 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었는데 굴뚝 맨 위에는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연가(煙家)를 설치했다. 교태전 아궁이에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땅 속 연도(燃道)를 따라서 이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굴뚝의 각 면에는 불노초를 물고 노니는 학(鶴), 귀면(鬼面), 소나무와 사슴, 대나무, 국화, 당초문 등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아미산에는 해와 달을 머금은 연못과 두꺼비가 양각된 연꽃 모양의 연못 등을 곳곳에 배치하여 이곳이 선계(仙界)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왕비의 무병장수와 평안,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고 기원하는 가운데 한 폭의 동양화처럼 굴뚝에 장식되어 있거나 혹은 신선이 사는 곳처럼 아미산에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길상문양 보다 더욱 상징적인 것은 아미산의 입지(立地)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아미산을 이곳에 조성함으로써 백두대간의 정기를 교태전으로 끌어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백두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뻗어내린 정기가 한북정맥을 통해 북한산을 거쳐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에 인공적으로 아미산을 만들어 그 백두대간의 정기를 교태전까지 끌어모았던 것이다.

따라서 '왕조의 법통(法統)을 잇고 생산하는' 교태전이 백두산의 정기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셈이다.

아미산은 일제때 경복궁 내전이 모두 뜯겨져 나가는 와중에도 다행히 철거되지 않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미산 굴뚝은 현재 보물 8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함원전

 

함원전은 경회루와 교태전 사이에 있다.

함원전의 굴뚝이 놓인 뒤편 화계(花階)와 교태전의 아미산 화계가 담 하나 사이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세종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함원전에 관한 기록은 무척 이채롭다.

1452년 문종이 승하한 뒤 당시 왕세자인 노산군(단종)이 잠시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는 기록도 엿보이지만, 경복궁의 내전 깊숙이 위치해 '불사(佛事)'를 주로 행하던 공간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세조 9년(1463)에는 내수소(內需所)에서 불상 4구를 만들어 이곳에서 점안하기도 했다.

또한 세조 10년(1464)에는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 때 '여래(如來)가 나타나는' 이적(異蹟)으로 사리를 얻자, 함원전에 공양(供養)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원각사의 백옥불상(白玉佛像)이 이루어지던 세조 12년(1466) 7월에는 이곳 함원전으로 불상을 들여 점안(點眼)하는 법회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함원전은 건립 초기에 불교와 깊이 연관된 궁궐 내 전각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몇 차례의 소실을 거쳐 1865년 경복궁의 재건 무렵 다시 지었다.

한편 당시 현판 글씨는 신정왕후 조대비의 조카인 혜인 조영하가 썼는데, 조영하는 최익현과 함께 흥선대원군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인물로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두루 거친 당대의 실력자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수습과정에서 대원군을 납치해 민씨 세력의 재집권에 공을 세우지만, 훗날 갑신정변(1884) 과정에서 살해되고 만다.

1876년(고종13) 11월 교태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내전 일곽이 크게 손실되는데 그 때 함원전도 소실되고 만다.

이후 1888년 다시 복구되었으나, 경복궁의 다른 내전 건물과 마찬가지로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에 의해 이를 복원한다'는 핑계로 1918~1920년 무렵 창덕궁으로 뜯겨나간다.

현재의 함원전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다시 복원된 것이다. 현판은 옛날에 쓰던 것을 수리하여 다시 걸어 놓았다. 정면 6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자경전

 

자경전은 경복궁의 내전 동북방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1908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궐도형>을 통해 보면, 고종 무렵 경복궁 재건 당시 이곳은 말 그대로 구중궁궐(九重宮闕)의 깊숙한 곳에 꽤 큰 규모로 격식있게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자경전은 고종 4년(1867) 지어져 고종이 정무업무 등을 보는 왕의 편전으로도 잠시 쓰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고종 10년(1873)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졌으나 고종 13년(1876)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 뒤 고종 25년(1888) 재건 공사를 실시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자경전을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경복궁 재건 당시 대왕대비이자 추존된 익종(효명세자)의 왕비인 신정왕후 조대비이다.

자경전은 고종을 양아들로 삼아 왕위에 오르도록 했던 조대비가 머물렀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종이 왕위에 즉위하는 과정에서 조대비의 역할은 실로 막강했고, 고종 즉위후 흥선대원군과 고종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정치적으로 결탁된 조대비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결국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런 흥선대원군의 입지를 강화시켜준 경복궁 재건사업 역시 조대비의 명을 받드는 형식으로 실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 무렵의 몇 차례 화재로 재건을 거듭했지만, 다행히 이곳 자경전 만큼은 일제의 훼손을 피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자경(慈慶)이란 건물의 이름 또한 자친(慈親), 즉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분의 경사와 무병장수 등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자경전은 누마루로 된 청연루(정면 1간 측면 2간)와 협경당(協慶堂, 정면 6간 측면 2간), 복안당(福安堂, 정면 6간 측면 2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구성되어 있다.

자경전은 정면 10간 측면 4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자경전은 현재 보물 8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경전 꽃담과 십장생(十長生) 굴뚝

 

대왕대비가 머물렀던 공간답게 자경전 또한 여성스러운 느낌과 멋이 한껏 넘치는 공간이다.

그런 까닭에 자경전의 곳곳을 장식하는 각종 의장과 문양 등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문양들이 상징하는 뜻 역시 공간의 용도 및 특성과 밀접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경전 서편 꽃담과 자경전 뒤편 십장생 굴뚝이다.

자경전 서편 담장은 마치 여러 폭의 화조도(花鳥圖)와 글씨, 문양 등을 벽에 펼쳐 놓은 듯 아름답다. 자경전 꽃담에는 좌측으로부터 매화, 복숭아, 모란, 석류, 국화, 영산홍, 대나무 등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장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만(卍)자, 귀갑문(龜甲紋) 등의 연속무늬도 꽃 담에 함께 어우러져 벽면의 여백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한편 자경전 뒤편에는 불로장생(不老長生)를 상징하는 거북, 학, 소나무, 불노초 등 십장생(十長生) 문양과 후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포도문양 등이 굴뚝 전면에 병풍 속 한 폭의 그림처럼 표현된 '십장생 굴뚝'이 세워져 있다.

또한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뜻을 담은 귀면(鬼面)과 불가사리 등을 굴뚝의 위와 아래에, 만복을 기원하는 박쥐 문양을 굴뚝의 좌우측에 각각 만들어 넣었다.

자경전이 대왕대비를 위한 공간이었던 만큼 '액운을 물리치고 대왕대비의 무병장수를 빌었으며, 왕조의 번성과 만복이 깃들기를 염원하는' 상징적인 문양들을 굴뚝에 만들어 넣어 그 뒤편에 세워두었던 것이다

 

또한 십장생 굴뚝은 화려한 장식성 못지 않게 기능적인 굴뚝의 역할도 충실히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땅속에 조성된 연도(燃道)를 통해 이곳 십장생 굴뚝의 연가(煙家)로 연기가 빠져나가게끔 했던 것이다.

십장생 굴뚝의 위치 또한 대왕대비가 자경전 뒤편의 문을 열고 내다보았을 때, 장수와 부귀, 복을 기원하는 길상문양들이 새겨진 아름다운 굴뚝이 한 눈에 들어오게끔 배치해 놓았다.

십장생 굴뚝의 크기는 너비 381㎝, 높이 236㎝. 두께 65㎝이며, 굴뚝의 맨 위에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10개의 연가(煙家)가 설치되어 있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은 현재 보물 8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복궁 7 (06. 03. 04)  (0) 2006.03.15
경복궁 6 (06. 03. 04)  (0) 2006.03.15
경복궁 4 (06. 03. 04)  (0) 2006.03.12
경복궁 3 (06. 03. 04)  (0) 2006.03.11
경복궁 2 (06. 03. 04)  (0) 200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