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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경복궁 4 (06. 03. 04)

by 柔淡 2006. 3. 12.

사정전

 

근정전의 바로 뒤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왕이 공식집무를 보던 편전(便殿)으로 쓰였다.

뿐만 아니라 사정전에서는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거나 종친, 대신들에게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사정전'이란 이름은 태조 3년(1495) 10월 경복궁 창건당시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으로, '사정(思政)'의 뜻은 '임금이 깊게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 백성을 굽어살필 수 있도록 취해야 할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그 뒤 사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 4년(1867)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정전 바닥은 온돌이 깔려있지 않다. 따라서 연중내내 이곳에서 공식적인 집무를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사정전의 동서쪽에 위치한 만춘전, 천추전 등에 온돌을 깔고 사정전과 더불어 왕의 일상적인 집무실로 함께 쓰였다.

이처럼 사정전은 왕의 편전이면서, 크고 작은 행사가 열렸던 상징적인 중심 건물이었던 것이다.

사정전 내부에는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운룡도(雲龍圖)'가 벽화에 그려져 있었으나, 2001년 초 보존처리를 위해 떼어내 별도 보관하고 있어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정면 5간, 측면 3간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

사정전의 양옆으로 동쪽에 만춘전(萬春殿)이, 서쪽에 천추전(千秋殿)이 있다.

이곳은 사정전의 부속건물들로, 사정전과 마찬가지로 왕이 공식업무를 수행하던 편전(便殿)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정전과는 달리 온돌이 깔려 있어 보다 일상적인 공식업무를 보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천추전은 세종때 학문과 문화를 꽃피웠던 요람이기도 했으며, 1908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궐도형>에 의하면 천추전 옆 행각과 수정전(옛 집현전) 사이에는 복도가 설치되어 왕의 출입을 배려한 흔적도 보인다.

 

현재 천추전은 고종 2년(1865)에 재건된 후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만춘전은 고종 3년(1866) 재건되어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1988년 다시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전도>에 의하면 만춘전과 천추전의 원래 위치와 현재의 위치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지금처럼 사정전 행각에 둘러쌓여 사정전 좌우측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사정전 행각 밖에 별도로 위치해 복도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춘전과 천추전이 지금과 같은 위치로 정해진 것은 고종 무렵 경복궁 재건 당시로 추정된다. 이들 건물은 모두 정면 6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강녕전

강녕전은 왕의 침전(寢殿)으로, 사정전 바로 뒤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에 있다. 향오문(嚮五門)을 통해 강녕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이곳 영역은 강녕전을 중심으로 부속건물인 연생전과 연길당이 동쪽에 있고, 경성전과 응지당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이 공간을 침전영역으로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왕의 침소라는 축소된 의미보다는 '왕의 일상적인 생활 및 업무공간'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왕이 강녕전을 침소로 쓰기도 했지만, 대신들과 만나 일상업무를 보는 집무공간으로도 활용하거나 연회를 베풀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 가족들과 연회를 즐길 때는 강녕전 월대를 중심으로 임시 가설무대를 넓게 설치하여 이곳에서 궁중가무 등을 관람하기도 했다.

 

강녕전은 태조 4년(1395) 경복궁 창건과 더불어 지어졌으며, 강녕전이란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이다.

강녕의 뜻은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 중에 셋째인 강녕(康寧)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가운데 늘 덕을 쌓고 황극을 세우면 오복을 누리게 되는데, 오복의 가운데가 바로 강녕이고 이는 오복을 모두 차지하기를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이후 강녕전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고종 2년(1865) 재건되었다. 그러나 한일합방이후 1917년 11월 창덕궁 내전 일대가 화재로 크게 소실되자,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강녕전을 비롯한 경복궁 내전건물 대부분이 일제에 의해 헐려 옮겨진다. 이로써 경복궁은 더욱 황폐해지고 만다.

현재의 강녕전은 각종 옛 기록 등을 토대로, 1995년 12월 다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

 

강녕전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위치한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의 부속건물격인 소침(小寢)이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태조 4년(139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고종 2년(1865)에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내전이 화재로 크게 소실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연생전과 경성전을 모두 헐어 창덕궁으로 옮겨 폐허가 되고 만다. 현재의 모습은 1995년 다시 재건된 것이다.

강녕전 동쪽에 위치한 연생전은 '만물이 생성되는' 봄(春)을 상징하고, 강녕전의 서쪽에 위치한 경성전은 '결실을 맺는' 가을(秋)을 상징한다.

연생전과 경성전의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정도전이 지어 올렸는데, 이는 왕조사회의 통치관을 성리학적 원리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정도전의 글에 의하면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 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정면 7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연길당(延吉堂)과 응지당(膺祉堂)

 

연길당과 응지당 역시 연생전, 경성전과 마찬가지로 강녕전에 딸린 부속건물이다.

하지만 연생전과 경성전보다는 규모가 작고, 좌향도 다르다.

즉 연생전과 경성전이 강녕전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반면, 연길당과 응지당은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전도>에는 이들 건물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고종 무렵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의 다른 내전 건물과 마찬가지로 이곳 연길당과 응지당 역시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에 의해 이를 '복원한다'는 핑계로 1918~1920년 무렵 창덕궁으로 모두 뜯겨나간다.

현재의 연길당과 응지당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다시 복원된 것이다.

연길당의 현판 글씨는 효당 김훈곤 선생이, 응지당의 현판 글씨는 운암 조용민 선생이 각각 쓰고, 제작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맡았다.

두 건물 모두 정면 4간 측면 3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흠경각

 

강녕전 뒤편에서 경회루 쪽으로 난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면 흠경각이 나온다.

흠경각은 세종 20년(1438) 1월에 건립되었고, 여기에 장영실로 하여금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 뒤 흠경각은 몇 차례 소실을 반복하다가 마지막으로 1888(고종 25년) 재건되지만,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에 의해 이를 '복원한다'는 핑계로 1918~1920년 무렵 경복궁의 다른 내전 건물과 마찬가지로 이곳 흠경각 건물도 뜯겨진다.

현재의 흠경각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다시 복원된 것이다.

현판은 동강 조수호 선생이 쓰고, 제작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맡았다. 정면 6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당시 흠경각에는 자동물시계인 옥루(玉漏)와 별자리의 위치를 표시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를 설치하여 시간과 천체의 운행을 살피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미 세종 16년(1434) 7월 자격루를 설치한 보루각(報漏閣)을 만들었으며, 그이전에 경회루 북쪽에는 천체의 운행을 살피는 간의대(簡儀臺) 등을 설치하였다.

경회루와 내전 지역에 이처럼 천체의 운행과 기상의 변화 등을 살피는 과학기구를 가까이 두었다는 것은 농정(農政)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세종의 왕권이 보다 공고해지고 궁궐의 기능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뒤 흠경각은 몇 차례 소실을 반복하다가 마지막으로 1888(고종 25년) 재건되지만,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에 의해 이를 '복원한다'는 핑계로 1918~1920년 무렵 경복궁의 다른 내전 건물과 마찬가지로 이곳 흠경각 건물도 뜯겨진다.

현재의 흠경각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 다시 복원된 것이다.

현판은 동강 조수호 선생이 쓰고, 제작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맡았다. 정면 6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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