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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경복궁 6 (06. 03. 04)

by 柔淡 2006. 3. 15.

동궁

동궁은 장차 보위에 오를 세자를 위한 공간이다.

조선전기 경복궁의 배치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인 <경복궁전도>, <경복궁도> 등을 통해 볼 때 동궁은 경복궁의 중심축 동쪽에 처음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즉 경복궁 남쪽의 금천 위로부터 근정전, 사정전 영역의 바로 옆 동쪽 일대에 동궁이 위치했던 것이다.

동궁이란 궁궐 중심축의 동편에 세자가 머물면서 왕위계승을 위해 준비를 하던 곳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세자를 동궁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편 동쪽은 방위상 봄에 해당하기 때문에 동궁을 춘궁(春宮)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경복궁의 동궁은 세종 9년(1427)에 짓기 시작한다. 이때 세자의 거처인 자선당과 서연을 하던 승화당(承華堂)을 건립하게 된다.

또한 문종이 동궁에 거처하면서 세자시절인 1441년 7월에는 자선당에서 단종이 태어나기도 한다. 세종 25년(1443) 5월에는 세자가 백관의 조회를 받는 계조당(繼照堂)이 건립된다. 세자가 왕 대신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종이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문종의 유지에 따라 계조당과 승화당을 다시 헐게 된다.

한편 세조 8년(1461) 12월에는 동궁을 경복궁 서북쪽 간의대 남쪽에 다시 지어 잠시 그곳을 동궁으로 쓰기도 한다. 이는 세조 스스로 왕위 찬탈로 인해 문종이 오래 거처하던 동궁에 대한 정치적 부담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후 동궁은 1544년과 1553년 두 차례 걸친 큰화재로 소실되어 1554년 9월에 다시 복구되지만, 임진왜란으로 또다시 소실되어 고종 4년(1867) 다시 재건된다. 이때 동궁의 배치와 규모는 사정전 동측에 자선당과 비현각이, 그 남쪽에는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을 포함한 동궁에 딸린 부서들이 있었다.

한편 세자가 백관의 조회를 받던 계조당(繼照堂)은 춘방과 계방 남쪽에 있었다.

춘방은 세자시강원이라고도 하며 세자가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으며 서연(書筵)을 열던 곳이며, 계방은 세자의 경호업무를 맡아보던 세자익위사를 말한다.

동궁은 그러나 1915년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앞두고 1914년 일제에 의해 모두 헐려나갔다.

동궁이 헐려나간 자리에 일제는 그후 서양식 석조건물로 조선미술관을 지었으며, 해방이후엔 다시 전통공예관으로 활용되다가 90년대 중반 전통공예관을 헐고 동궁 복원작업에 들어가 1999년 12월 동궁의 일부를 복원 완료된다. 현재는 동궁영역 중 일부인 자선당과 비현각 일곽만 복원해 놓았다.

 

 

비현각

 

비현각은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편전에 해당한다. 비현(丕顯)이란 뜻은 "크게 드러나다"라는 뜻이다.

이곳의 건물이름은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전도>와 <경복궁도>에 나와있다. 비현각 역시 임진왜란을 통해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고종 4년(1867)에 이르러 다시 재건된다.
하지만 일제강정기인 1915년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앞두고 '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1914년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하고 만다. 이때 비현각은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방매 처분된다.

 

팔려나간 비현각의 행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번째는 서울 장충동의 일본인 별장인 남산장(南山莊)으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다.

두번째는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1912년 남대문 정거장 뒤 봉래동 자신의 집으로 뜯어가 설계사무소로 쓰다가 누전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이야기다.

한편 현재의 비현각은 1999년 12월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정면 6간 측면 2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자선당 현판 글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썼다.

 

 

자선당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침전이며 동궁전이라고도 부른다. 자선(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9년(1427)에 자선당을 짓기 시작했다. 자선당은 문종이 세자로 책봉된 뒤 1450년 2월 즉위하기 전까지 20여년간 머물던 곳이기도 하며, 1441년 7월 단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기도 한다.

또한 이때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은 뒤 이곳에서 승하하기도 한다. 자선당은 이후 몇 차례 소실을 거친 뒤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어 고종 4년(1867)에 이르러 다시 재건된다.

그러던중 1915년 일제가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앞두고, 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1914년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한다.

이때 자선당은 경복궁 철거업무를 맡아보던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 의해 일본으로 빼돌려져 '조선관(朝鮮館)' 간판을 달아 미술관으로 쓰였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불타 없어지고 기단석만 남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후 자선당 기단석은 오쿠라호텔 경내에 방치되어오다가, 1996년 반환되어 현재 경복궁 명성황후 시해터 부근에 옮겨 놓았다.

한편 현재의 자선당은 1999년 12월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정면 7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자선당 현판 글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썼다.

 

 

 

 

 

수정전

수정전은 경회루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수정전은 국왕이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곳, 혹은 편전 등의 용도로 쓰였던 건물이다.

세종 때는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세종 28년(1446) 9월 이곳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기도 한다.

세조 때는 예문관(藝文館)으로도 쓰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고종 4년(1867) 재건된 후 군국기무소(軍國機務所) 및 내각(內閣) 청사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일제시기에는 박람회장으로 쓰이는 수모를 겪다가, 1966년 10월 이곳에 현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인 '민속관(民俗館)'을 우리 손으로 개관하기도 했었다

 

현재 수정전은 수정전 건물과 월대만 남아 있지만, 1908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궐도형>에 의하면 수정전 주변이 행각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수정전 건물의 좌우측으로 다시 복도를 내어 수정전 주변 행각과 바로 연결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정전 주위 행각은 사정전 천추전 방향의 행각과 복도로 연결했음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들어와 일제는 수정전 주위의 행각을 모두 철거하고 만다.

현재는 수정전 건물 좌우측에는 당시에 복도를 연결했던 흔적만 남아 있다. 한편 수정전은 건물의 간수(間數)로 따졌을 때, 현존하는 경복궁 내 전각 중 규모가 큰 건물에 해당한다.

정면 10간 측면 4간의 총 40간 규모의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재수합

 

경복궁 민속박물관을 향하다 보면 한 채의 건물이 홀로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재수합이다.

재수합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고종 2년(1865)∼고종4년(1867)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 마당 자리는 일제에 의해 모두 헐려나가기 전까지 내전 건물이었던 만경전(萬慶殿)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재수합은 남쪽에 위치한 부속건물로써 왕실가족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면 7간 측면 2간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고궁박물관

 

 

 

 

 

향원정

경복궁 북쪽 후원영역에 향원지(香遠池)라는 이름의 네모난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연못의 중앙에 둥그런 섬을 조성하여 육각지붕의 2층 정자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향원정이다.

이 섬의 남쪽으로는 취향교(醉香橋)라는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원래는 건청궁(乾淸宮) 방면으로 향하도록 북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다리가 소실되자 1953년 현재의 모습처럼 남쪽으로 새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향원정 북쪽을 보면 고종 당시 다리를 북쪽으로 가설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

다. 향원정의 창건은 고종 4년(1867)∼고종 10년(1873) 무렵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2년(1456) 3월 경복궁 후원에 정자를 새로 짓고 취로정(翠露亭)이라 했다는 기록이 나와있어, 이 취로정 터에 고종 때에 이르러 향원정을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향원(香遠)이란 이름의 뜻은 <태극도설>을 지은 중국 송나라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 중 '香遠益淸(향기는 멀수록 맑다)'에서 따와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향원정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온돌을 깔았고, 2층은 마루로 되어 있다.

향원정 1층에는 불을 때던 작은 아궁이가 서쪽에는 있으며, 2층에는 천장에 주작 등을 그려 넣어 그 화려함을 더했다.

한편 향원정의 물은 향원정 북서쪽 열상진원(洌上眞源)에서 흘러 들어와 남쪽으로 빠져나도록 되어있다.

즉 열상진원에서 솟아난 물이 홈을 만나 한바퀴 돌아 다시 꺾여 향원지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이는 샘에서 솟아난 차가운 물이 격하지 않고, 차갑지 않게 향원지로 입수하게끔 마련된 장치인 것이다.

 

 

 

 

 

 

 

 

열상진원 우물

 

건춘문

경복궁의 동문(東門)이다. 동쪽은 방위로 볼 때 봄(春)에 해당하기 때문에 건춘문이라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쪽의 방위신인 청룡(靑龍)이 홍예의 천장에 그려져 있다.

이문은 왕실의 종친과 상궁들이 주로 드나들던 문이라고 한다.

건춘문을 들어와 왼편으로 들어가면 왕실 가족들을 위한 생활공간들이 밀집되어 있었으나 일제시기에 모두 헐리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건춘문의 담장 남쪽 끝에는 동십자각(東十字閣)이 맞닿아 있었으나, 이 또한 일제시기에 잘려나가 현재는 동십자각만 도로 가운데에 떨어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8년(1426) 10월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하여 지금의 건춘문으로 이름을 확정했다고 한다.

현재 건춘문은 고종 2년(1865)에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을 냈으며 정면 2간 측면 2간의 규모이다. 이익공의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영추문

경복궁의 서문(西門)이다. 서쪽은 방위로 볼 때 가을(秋)에 해당하기 때문에 영추문이라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쪽의 방위신인 백호가 홍예의 천장에 그려져 있다. 이문은 궁궐을 출입하던 관리들이 주로 드나들던 문이라고 한다.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에 보면 "...연추문(延秋門) 드리다라 경회(慶會) 남문 바라보고 하직하고 물러나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연추문은 오늘날의 영추문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문무관료들은 송강 정철처럼 이 영추문을 통해서 경복궁에 드나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추문을 들어오면 궐내각사가 밀집되어 있었으나, 일제시기에 모두 헐리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영추문의 담장 남쪽 끝에는 서십자각이 있었으나, 이 또한 일제시기에 사라지고 지금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8년(1426) 10월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 하여 지금의 영추문으로 이름을 확정했다고 한다.

현재의 영추문은 고종 2년(1865)에 중건했으나, 1950년대에 무너졌던 것을 1975년에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을 냈으며 정면 2간 측면 2간의 규모이다. 이익공의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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