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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창덕궁 (일반관람구역) 1 - (돈화문 - 상서원) (08. 10. 26)

by 柔淡 2008. 10. 29.

창덕궁 특별관람구역인 옥류천 일대의 단풍을 보기위해 인터넷으로 신청하려고 했지만 10월 관람예약은

9월 20일에 끝이났다. 혹 취소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여 매일 들락거렸지만 취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매번 현장매표 10명분이 있기에 아침일찍 매표소에 기다렸더니 내가 첫번째다.

문화재청에서 고궁의 단풍시기를 홍보한 내용에는 10. 25일부터 어느정도 단풍을 만날수 있다고 했던데

10. 26일에 가보니 아직 3주일은 더 있어야 제대로 된 단풍을 볼수 있을것 같다.

특별관람은 하루 세차례가 있는데 그중 첫번째인 10시에 들어갔다.

특별관람도 일반관람구역의 일부구역을 지나가기에 일반관람구역과 중복되는 일부구간부터 정리를 한다.

 

혹시 일반관람구역의 제대로된 내용을 보려면 2006년에 다녀온 기록을 링크해 놨으니 참고하시기 바람

http://blog.daum.net/j68021/5597658 (창덕궁 1 ~ 4)

 

여기에 있는 설명들은 궁궐길라잡이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http://www.palaceguide.or.kr/company/menu01.php

 

 돈화문창건된 것은 태종 12년(1412)이며, 2층 문루에는 큰 종을 걸고 시각을 알리거나 비상시 위급을 알리는 용도로 썼다고 전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여 광해군 원년에 완공되고 이때의 건물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보물383호).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 지붕의 다포양식이다. 궁궐의 대문 가운데 정면이 5칸인 것은 돈화문이 유일한 것이나 좌우쪽 협칸은 벽으로

막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3칸 대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황제가 아닌 군주는 대문을 3칸으로 해야 하는 중국과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곧 3칸 대문으로 만들어 중국의 사신을 의식하면서도 외관은 크고 장중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돈화문을 들어서서 왼편으로 안내판 뒷편 일대에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무들이 서너그루 있다. 가시가 없고 크기도 큰 이 나무들은

괴목,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라 한다.

돈화문을 지나면, 느티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느티나무는 특히 우리나라, 우리민족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나무이다.

우리나라의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으니 이때 가장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 것이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군림하기도 했고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로 때로는 서당의 선생이 강학하는 민족의 애환이 모인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입구에서 만난

이 나무가 다른 어떤 나무보다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한자로 쓰면 모두 “괴(槐)”가 된다. 괴는 주나라 이래 궁내에 심는 나무의 대표적 수종이다. 주례에 보면 주나라

시대에는 궁의 고문(궁성의 가장 바깥누문을 말함)과 응문(궁중의 정문)사이에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심어서 이 나무 밑에 삼공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오는 이를 맞이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이 제도에 따라 궁궐 입구에

괴수를 심었다. 원래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도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설 당시 사라져 버렸다. 물론 경희궁터와 경운궁에도 느티나무가 있었다. 현재 신문로 시립박물관 동쪽 주변이나 정동일대에 군데 군데

보이는 거목들이 바로 궁궐에 속해 있던 느티나무들이다. 궁안에 심는 나무 하나에도 돌 하나에도 의미와 철학을 담는 우리 조상들의

대단함에 또한번 놀란다. 창덕궁 안 다른 곳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데, 나무에도 뜻을 심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은분이 안내를 아주 재미있게 잘해 주신다. 이분들은 궁궐길라잡이 자원 봉사자 들이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길은 메마른 느낌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원래는 박석 깔려있던 길이라 한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은 어도로 그 길은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진행되다가 금호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여 창덕궁 내부로 향하게 되어있다. 흘러내리는 산자락에 맞춰 자연스럽게 건물을 배치하다 보니 그렇게 축이 꺾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꺾인 길앞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개울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그 개울을 금천이라 하는데 궁궐의 안팎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리기 위한 명당수의 의미가 있다. 옛날에는 당연히 맑은 물이 흘렀을 금천에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금천과 어도가 만나는 지점에는 다리가 놓인다. 이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라 하는데 이것은 태종 11년(1411) 창덕궁을 처음 지을 당시의 것으로 창덕궁과 다른 궁궐을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건축물이다. 다른 것들은 임진왜란이나 혹은 일제시대 때 불타고 헐렸으나 금천교는 60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금천교는 돌다리치고는 상당히 넓은 다리다. 전체가 세 구획으로 이루어진 삼도인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당히 넓고 좌우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 네 귀퉁이에 동물 석상이 감시를 하고 있다. 네마리 짐승이 제각각 다른 몸짓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다리 밑의 물길에는 홍예를 틀었는데 두 홍예 사이 역삼각형이 이루어진 부분에는 도깨비 얼굴이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그 앞뒤 도깨비 얼굴 앞에는 짐승들이 앉아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은 얼핏 보면 해치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몸에 털이 아니라 비늘이 덮여있고, 뿔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을 보면 해태는 아니다. 혹 백택(白澤)이라고 하는 또 다른 상상의 짐승이 아닐까 추측된다. 북쪽에 있는 것은 몸통은 거북이 같으나 얼굴을 보면 사람 얼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무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북인 아니다. 거북이 몸통에 용의 얼굴을 하고 북쪽을 지키는 상서로운 짐승을 현무라 하니 이것도 현무라고 해야 할까. 현무는 청룡, 백호, 주작과 함께 넷이 짝을 이루어야 하나 여기는 둘뿐이니 현무라고 하기도 어렵다.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 있다. 일제시기 언젠가 없어진 것을 지금 완공해 제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금천교와 진선문은

엇갈려 있다. 옛사진을 보면 금천교에서 눈을 감고 곧장 걸으면 바로 진선문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축이 똑바르지 않아 보인다.

진선문에는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 와서 치면 왕이 듣고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주마고 하는 큰북이 달려 있었는데, 태종대에 처음 설치하였다가

중간에 유명무실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하였다 한다. 이 북을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이 궁궐 문으로

들어가서 북을 쳤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들어서면 건너편 동쪽에는 “숙장문” 북쪽에는 “인정문” 남쪽에는 긴 행랑이 둘러싸고 있는 넒은 마당이 있다.

진선문 좌우의 행랑과 남쪽 행랑은 병조에서 궁궐을 지키기 위 해 파견된 분실이라 할 “내병조”, 왕의 의복과 궁궐에서 쓰는 보물 과

인장등을 관리하는 “상의원”, 왕이 참여하는 큰 행사에 장막을 치는 일을 담당하는 “전설사” 등이 들어있는 궐내각사의 연장이다.

그중 진선문과 숙장문은 일제에 의해 사라졌으나, 1996년 복원공사를 해 지금은 재건되었다. 진선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네모난 넓은 마당은

즉위식이나 각종 큰 잔치 혹은 중대한 재판을 진행하던 곳으로, 곧 궁궐 안의 광장인 셈이다. 왕들은 이 마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인정문을

들어가 인정전 용상에 앉음으로써 왕이 되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이다. 태종 5년의 창덕궁 창건 때에 건립된것을 태종 18년(1418)에 고쳐 짓도록 하여 7월 착수되고 같은 해인 세종 즉위년 9월에 준공된다그 뒤 36년이 지난 단종 때에 해체보수공사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에 중건된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인정전만은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 정조 6년(1782)에는 이전에 없던 품계석을 인정전 앞뜰에 설치하였고 이 품계석은 다른 궁에도 설치하게 되었다.

그 뒤 순조 3년(1803)에는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에 중건된다. 50여년 뒤인 철종 7년(1856)에는 건물이 퇴락하였다는 이유로 또 한차례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시행하였으나 건물의 형태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현존하는 건물의 골격은 순조 때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창덕궁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는 1908년 무렵 인정전의 내부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회흑색의 전돌로 깔린 실내바닥을 서양식 쪽널마루로 만들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출입구를 제외한 창문 아랫부분의 외벽에 전벽돌로 쌓았던 화방벽이 철거되고 대신에 목재의 큼직한 머름대와 궁판으로 바뀌었다. 또 창문 내측에 별도의 오르내리창이 설치되며 휘장을 설치하기 위한 커튼 박스도 만들어지고 지붕의 용마루에는 이왕가를 상징하는 배꽃문장으로 장식하여 왕궁이 아닌 가문의 건물로 격하시켰다.

 

 

 

 

 인정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문이 셋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큰문은 왕의 출입문인 어문이다. 동쪽은 문인, 서쪽은 무인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태종 5년에 인정전과 같이 창건되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중수하였고 영조 20년(1744)에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1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지금의 모습은 1912년경에 인정전의 행각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전시장 출입문의 기능으로 바꾸기 위해 벽체와 바닥의 구성을 인정문을 들어서서 바로 회랑의 전시장으로진입할 수 있도록 일제가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인정문의 편액은 검정 바탕에 흰글씨로 양각하였고 선조때의 명필인 “북악 이해룡”의 글씨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