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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창덕궁 (일반관람구역) 3 - (후원 주합루 - 영화당) (08. 10. 26)

by 柔淡 2008. 10. 31.

여기부터가 창덕궁 후원이다. 후원의 일부분인 부용지, 영화당, 애련정 구역은 평시 일반관람이 가능하다.

 

후원의 역사

창덕궁 후원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 초기인 태종 때이다. 왕조실록에 태종 5년 10월 창덕궁이 세워졌다는 기록과 이듬해인 태종 6년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을 지었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있어 이 창덕궁 동북쪽이 바로 비원으로 알려져 있는 곧 후원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해온정이라는 정자 앞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잔치를 벌이고 등놀이를 하였다. 해온정은 태종 14년에는 "신독정"이라 이름을

고쳤는데 세종때 부터는 별로 이 신독정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세종이 창덕궁보다 경복궁에 즐겨 머물렀던 까닭이라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 정자가 사용되지 않아 자연히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세조 때에는 후원좌우에 연못을 파게 하였다는 기록이

세조실록 5년 9월26일 기록에 보이고 또 세조 7년 11월에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열무정"은 세조 5년에 판 연못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예종 때에도 후원에서 습진(적을 뒤쫓아가 공격하는 연습)이 있을 때 이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궁궐지에는

"열무정" 북쪽에 사정기를 쓴 비석을 세워둔 비각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부용지 서쪽에 "마니" "파려" "유리" "옥정"의 4개의 샘에 대하여 기록한 비각 곧 "사정기 비각"이 서 있다.


세조는 후원을 확정하였다. 세조 8년 정월에 동복  담장을 넓게 쌓고자 하여 둘레 4,200자 (약 1,272미터)로 그 안에 있던 백성의 집 73채를 헐었다.

또 58채의 집들을 헐어 북쪽담장도 넓게 쌓아 후원의 경계가 지금처럼 성균관에 가깝도록 하였다. 이때가 세조 9년 이였다. 창덕궁 후원이 넓어지면서

왕과 왕의 가족들이 쉬던 곳이 난잡한 놀이터로 변한 것은 연산군 때이다. 연산군 3년 초에 후원의 서쪽담장을 높이 고쳐 쌓게 하여 궁밖 사람들이

궁안의 놀이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고 또 9년에는 동쪽담장과 서쪽담장 아래쪽의 집들을 모두 헐게 하였다. 더욱이 10년에는 성균관이 후원과

근접하고 있다고 하여 성균관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연산군은 더 나아가 재위 1년(1505) 5월에는 새로 대를 쌓을 것을 명하였으니 이것이 서총대이다. 돌을 10자 높이로 쌓고 주위에 돌 양쪽 강에

배들을 띄우게 난간을 둘렀으며, 1,0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이로 만들었다. 또 대 앞에는 큰 엿못을 파게 하였는데 감독만 900여명이고 일꾼들은

수 만명 이었다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남으로써 공사는 중단되었고 중종 때 모두 철거되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창덕궁 후원에

일어난 일들은 이들말고도 성종 8년 (1477) 3월 3일 선공감에 명하여 후원에 채상단을 쌓게 한일도 있으니 이는 왕비가 양잠을 장려하던 일과

관계가 있으며 뒷날 1911년 후원의 주합루 서쪽 서향각에 양잠소를 만들게 한 일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또 임진왜란(선조25년)전인 선조 7년 (1574)8월9일에는 후원에 말이 달리는 길을 만들어 기사를 시험케 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서내에서 없었던

일이니 하지 않을 것을 간하였으나 임금께서 듣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은 모두 불타고 후원도 그 피해가 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영건청을 두어 여러 건축공사를 강행하자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영건청을 없앨 것을 간하였던 일이 있다.

이해 광해군은 ""근일 영건청을 없애라는 삼사의 논의가 있었는데 그 말은 옳다...책방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한가롭게 놀 곳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몸과 마음이 불안할 때 쉴 곳이 없어 책방을 만들어 몸과 마음을 고치는 병당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니 영건청을 폐하기는 어렵고...

혼경전 영화당같은 것은 영조하지 말도록 하여 공의에 따르겠다"는 기록이 광해군일기 2년 2월 을미조에 보이고 이 기록 밑에 "이 여러 전각의

건축일 들은 모두 먼저 이루어졌다. 또 별전 여러곳도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 또 "기이한 화초,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돌 사이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유람에 대비하였는데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라고 주해 되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재정에도 불구하고 크게 공사를 하여 후원의 위용을 갖춘 것을 알 수 있다.

 

부용정 북쪽으로는 넓다란 장방형 연못이 있다.

이 방지의 크기는 세로 34,5m 가로 29.4m나 되는데 가장자리는 장대석들을 바른층 쌓기로 하여 마감하였다. 또 못 가운데에는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둥근 섬이 하나 있다. 연못이 네모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하는 천원지방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못은 대개 네모나고 또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하나씩 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루어져 왔다.

 

[삼국사기]의 백제 무왕때 기록을 보면 "궁궐남쪽에 못을 파고,20여리 밖으로부터 물을 끌어드리고 네 가장 자리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방장 선산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고 쓰여져 있다 여기서 네 가장자리라는 것을 바로 못이 네모난 방지임을 말해 주고 방장 선산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산다는 방장, 봉래, 영주의 세 선산 가운데 하나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사상이 일찍부터 정원 조영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게 해준다.

 

곧 부용지의 조영에는 음양론, 도가사상 등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오래된 조형 원리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용지의 물은 지하에서

솟아오르고 또 서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연못 서쪽에 있는 용머리의 석루조로 들어오는데 180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는 석루조가 없고 가운데의

섬도 지금보다 훨씬 작으며 배가 2척 떠 있다. 연못의 가득찬 물은 동쪽 연못 가장자리에 뚫어 놓은 수구로 간다. 그리고 부용정 쪽은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하였는데 한 돌에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부용정은 숙종 33년(1707)본래 택수재로 지은 것을 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부르게 된 정자이다. 정자의 남쪽은 낮은 동산인데

여기는 단이 지게 흙을 파내어 고르고 그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단마다 꽃을 심거나 석함을 놓아 치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정원에서의 화계라 부르는 것이다.

화계는 글자 뜻 그대로 꽃을 심어 만든 계단을 말하는데 궁궐 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이나 정자, 누대 등이 서 있는 주변에 구릉이 있는 곳이면

화계를 꾸민다. 우리나라는 전국토 2/3가 산지이기 때문에 곳곳에 산과 구릉이 많아서 이런 화계를 (부용정에 새겨진 물고기)두는 것이 일반적인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화계는 특히 뒤뜰 뒷동산을 중심으로 두기 때문에 예부터 뒷동산을 잘 가꾸어 왔고 이를  가꾸는 사람을 "동산바치"라 불렀다.
동산바치는 오늘날의 정원사이다.

 

부용정 화계위에는 석함이 있고 석함에는 괴석이 담겨져 있는데 일종의 정원을 꾸미는 석물이다. 괴이하게 생긴 그러나 운치 있는 괴석을 담아 두는

석물이라 하여 석함이라 부르며 때로 괴석을 받쳐주는 대라는 뜻으로 괴석대라고 도 한다. 석함은 일반적으로 정방형이나 장방형이지만 때로 육각형,

팔각형이기도 하다. 그 높이도 다양하여 바닥에 닿는 낮은 것에서부터 높은 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괴석을 담은 석함을 올려놓기도 한다. 또 부용정

기둥에는 기둥마다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한시들이 초서체로 새겨져 있어 이들 시구를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시흥에 젖고, 더더욱 부용정의

공간정서에 몰입하게 된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천 떨기 고운 자태 아름다운 놀 흐르고

십리에 퍼진 맑은 향기 사향을 터트린 듯

낭원의 신선들 푸른 일산 펄친듯

대라천 일천 부처 향성에 싸여 있듯.

붉은색 푸른색 어리 비쳐 맑은 물에 드리웠고

꽃도 잎도 향기로워 발속에 스며드네

활짝 핀 꽃봉오리 삼천궁녀 취한 볼이요

연잎의 빗방울은 오백 나한 염주알이라.

거북이 놀고 고기 헤엄치는 맑디 맑은 가을 물속이요

이슬 짙고 바람 좋은 서늘한 초가을일레.

 

 

 

 

 

 

 주합루는 부용정 북쪽 맞은편 부용정 연목의 북쪽 놓은 언덕 위에 이층 다락집으로 우뚝 서 있다. 이 주합루를 처음 세운 것은 정조 원년인 1777년으로

아래층에는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정각이 있고 그 위층은 열람실로서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누대가 있다. 정문인 어수문을 들어서서

여러 단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노라면 먼저 주합루 팔작 지붕이 그리고 다음으로는 누의 공포 창방 기둥들이 눈앞에 다가 오다가 1층 규장각 제일 중앙

어간을 마주하게 된다. 누의 건축은 장대석 바른층 쌓기를 한 높은 기단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밖으로는 방주를 세우고 안쪽으로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에 익공 2개를 놓아 이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팔작 기와지붕을 덮었는데, 용마루는 양쪽에 회를 발라 양성을 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얹고 추녀마루에 잡상들을 얹어 한껏 치장을 하였다.

 

 

 

 

 어수문 낮은 터부터 주합루가 자리잡은 위 터까지는 중앙에 놓은 돌계단 좌우로 장대석 바른층 쌓기 한 석단들을 여러층 놓아 마무리 하였다.

이 석단에는 꽃도 심고 나무도 심었고 "동궐도"에서 살펴보면 어수문 좌우의 작은 협문으로 넝쿨을 말아 올리는 시설을 하여 여기에 푸른 식물들이

뒤덮여 있어 마치 푸른 병풍을 둘러놓은 듯하다. 이런 시설물 곧 취병은 "동궐도"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이곳 어수문 양쪽에서와는

달리 그 길이가 짧고 전각의 안뜰에 설치되었다. 어수문 양쪽으로 둘러친 긴취병은 어수문 위쪽 주합루의 공간과 부용정 부용지의 아래 공간을 커다란

2개의 공간으로 갈라 놓는 역할을 한다. 주합루 앞쪽 동쪽석단 위에는 운두가 놓은 장방형 기단석을 놓고 이 위에 상중하 세 부분으로 나눈 한 덩어리의

커다란 직육면체의 돌을 얹어 놓았다. 아래위는 중앙부보다 돌출되고 사면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기고 중앙에 들어<구름모양의 계단: 구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왕과 백성을 연결하는 의미를 나타낸다.>간 부분은 안상을 새겨 치장하였다. 석물은 한� 이런 석물 자체만으로서 정원의 한

장식품이 되는 수석으로 알려졌으나 과학사 분야의 연구로 낮과 밤의 시간을 알게 해주는 시계를 얹어 두던 하나의 받침돌 곧 대석임이 밝혀 졌다.

이것의 올바른 이름은 "일성정시의대"이다. 동궐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후원 곳곳에 해시계가 그려져 있는데 그만큼 당시에 궐밖의 종루와

자격루에만 의존하지 않고 생활하는 가까이에서 시각을 알게 하였던 것을 말해준다

부용지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단층집으로 정면 5간 측면 3간 되는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 정자 모양의 영화당은 숙종 18년(1682)에

다시 지은 것인데 궁궐지에는 "영화당 15간이고 남쪽에 남행각 7간이 있었고 여기에 의춘문이 있었으며 또 담장에 영화문 그리고 22간의 곳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과 일치하게 " 동궐도"에도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 정조 때부터 이곳 영화당 동쪽 넓은 마당에

과거장을 마련하고 영화당에 임금이 친히 참석하여 전시를 보여 인재를 뽑았다고 한다. 

 

 

 

 애련정구역 가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