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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창덕궁 (일반관람구역) 2 - (선정전 - 희정당) (08. 10. 26)

by 柔淡 2008. 10. 29.

숙장문을 지나면 선정전과 희정당 어차고가 나온다.

 

인정전에서 동쪽으로 위치한 건물이 선정전이다. (현재 새로 복원 된 선정전은 당시와는 차이가 있다.)

이곳은 왕이 신하들을 만나 국사를 논의하고 학자관료들과 유교경 전과 역사책을 공부하기도 하고 유생들을 불러모아 시험을 보기도 하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는 공식 집무실-편전이다. 법전인 인정전의 동쪽에 뒤로 약간 물러나 앉아 규범을 지키되 주변환경에 적합하도록 적응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 용도가 중요해서 그런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색 기와의 건물이다

 

세조 7년에 궁궐 건물들의 이름을 바꿀 때 “조계청”이라 하던 것을 선정전이라 하였다. 선정전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이 광해군 때 재건되고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인조 25년(1647)에 중건되었다. 이 때에는 광해군이 창건한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그 재목을 이용함으로써

700여 칸의 전각 중건을 5개월만인 짧은 기간에 완공한다. 그 뒤의 선정전 변천에 관해서는 현종 15년(1674) 7월에 건물이 손상된 것을 고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봄부터 앓아 온 질병으로 8월 현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시행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리고는 선정전의 수리에 관한 기록이 없으므로

이 건물은 인조 때에 중건된 건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선정전이 왕과 신하들을 공식적으로 만나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는 집무실이라면 희정당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장소이다.

1917년 11 월 10일 오후 다섯시 순종이 기거하던 대조전에서 불이 났다. 이 불은 그 주변의 건물로 크게 번져 대조전 희정당을 비롯하여

내전 일대의 주요 건물로 번져나갔다. 불이 난지 4일뒤 화재 처리 방도를 마련했는데, 우선 낙선재를 순종의 처소로 삼고 불타 없어진

내전 건물들은 다시 짓기로 하였다. 다시 짓기는 짓되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는 양식을 참고로 하기로” 정하였다.

 

 

 

 인정전에서 인정문으로 되돌아 나와 왼쪽으로 꺾으면 숙장문이다. 숙장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으로 '어차고'라고 안내판이 설치된 건물이 있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건물안에는 초헌, 연과 여 같은 가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프랑스제 마차도 있다. 1997년까지는 1909년산 영국

다임러 자동차와 1903년산 미국 제너럴 모터스 회사의 캐딜락자동차도 있었는데 1997년 말에 현대자동차에서 수리, 복원을 하기 위해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궁궐에 자동차 차고가 있고 유리창이 있고...

 

이곳이 이렇게 전시용 차고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기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원래 이 건물의 이름은 “비궁청”이라는 이름의 “빈청”이었다.

“빈청”이란 비변사 당상들, 다시 말하면 정승 판서급의 고위 신하들이 왕을 만나뵈러 궁궐에 들어왔을 때 또는 만나고 나와서 자신들끼리 현안을

논의하던 건물이다. 궁궐에 드나들던 관원들 가운데서 가장 고위 관원들의 공간이요, 그런 점에서 궐내각사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었다.

그런 빈청을 “어차고”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궁궐과 정치문화를 능멸하고 부정하는 일제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다. 그런 곳을 아직도

어차고라고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에는 아직도 일제시대가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어차고에 전시된 것 가운데 주정소라고 하는 물건에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안내문에는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인

화성의 현륭원에 참배갈 때 도중에 쉬던 시설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꼭 정조가 쓰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 모양이나 거기 새겨진

문양 등을 보더라도 어떤 왕이 썼던 간에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쓰던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왕 전용 이동조립식 휴게실인 셈이다.

 

 또 얼마 뒤 총독부와의 협의 하에 경복궁의 내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을 비롯하여, 그 주변 건물들 여남은 채와 그 부속건물의 구재를

창덕궁 전각을 중건하는 데 이건하기로 결정했다. 중건공사는 일본인이 감독을 맡아 진행했다. 그 중건공사는 원래 1년 안에 마칠 계획이었으나

중간에 고종이 승하하고 3.1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등 이런 저런 사정으로 3년이 걸려 1920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이렇게 총독부와 일본인이 맡아서

공사를 추진하고 더구나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양식을 참고하기로” 하면서 당연히 왜곡과 변질이 따르게 되었다. 창덕궁은 산자락을

끼고 있어 상대적으로 건물들의 크기가 경복궁에 비해 작다. 그런데도 좁은 희정당 터에 덩치가 큰 경복궁의 강녕전 건물을 억지로 들어앉혔다.

그러면서 모양도 바꿔 강녕전은 원래 지붕에 용마루가 없었으나 옮기면서 시멘트로 바른 용마루가 생겼다. 중앙의 세칸은 툇칸이라 하여 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던 것이 없어져 버렸고, 건물 앞에도 월대가 있어야 제격일텐데 가파른 계단만이 달랑 달려있다. 벽이 없는 앞마당에는 웬 굴뚝까지

서 있다. 희정당으로 들어가는 앞 건물에는 난데없이 일본식 현관까지 두 개가 튀어나와 있다. 자세히 보면 현관의 창방 부분에는 오얏꽃 무늬가

여기저기 달려있기도 하다. 동궐도의 아담한 건물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이질적인 모습이다. 지금의 희정당 안을 들여다보면 거실로 사용되는

부분이 정면 9칸 측면 3칸이다. 중앙부의 3칸은 전체를 응접실로 꾸미고 서쪽의 3칸은 회의실이 되고 동쪽의 3칸은 여러칸으로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1920년대에 중건하면서 내부는 서양풍의 가구와 치장이 더해져 커튼박스와 전등이 설치되고 쪽널마루 위에 붉은 카펫으로

설치한 모습이 이색적이다. 특히 응접실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 만물초승경도”가 각각 동쪽과 서쪽 벽에 걸려있다. 

희정당 동쪽 곁에 있는 건물의 이름은 성정각이다. 성정이란 말은 “성의와 정심”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성의란 뜻을 순수하게 집 중하는 것이요,

정심이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왕이나 왕세자가 이런 자기 훈련을 하던 곳이다. 왕이 학자들 과 책을 공부하며, 정책 토론,

곧 경연을 열거나 왕세자가 선생님들 과 공부를 하는 곳, 곧 서연을 열던 곳으로 자주 쓰였다. 문 이름도 영현문(현인을 맞이하는 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앞에 안내판에는 “내의원”이라 소개되고 있다. 애초에 내의원은 인정전의 서쪽 지금 일본식 창고건물이 있는 부근에 있었는데

이 건물이 왜 내의원이 되었을까? 이곳이 순종이 이 일대에 살던 일제시기에는 내의원으로 쓰였기 �문에 이렇게 소개하는 게 아닌가 짐작된다.

따라서 궁궐 본연의 모습을 알리지 못하고 일제시대에 어떻게 쓰였나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 의식이 아직도 일제시대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나쁜 사례로 볼 수 있다.

성정각은 그나마 사방으로 문을 꼭 걸어닫아 행랑채 너머로 담장 너머로 발돋움을 해야 겨우 중허리까지만 볼 수 있다. 성정각은 본채에 덧붙여

누가 번듯하게 솟아 있다. 남쪽 편에 붙은 편액의 누 이름이 “희우루”인데 동쪽에는 또 “보춘”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가뭄에 단비를 맞기도 하고

또 동쪽에서부터 전해오는 봄기운을 맞기도 하려는 염원인가 헤아려진다. 성정각에 기대어 보면 남쪽에 길게 뻗은 행랑채에 “조화어약”,

“보호성궁”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왕의 약을 지어 임금님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 일텐데, 원래는 내의원에 붙어 있던 것을 일제시기에 이곳이

내의원으로 쓰이면서 옮겨와 단 것으로 보인다. 마당에는 약재를 빻던 돌절구도 놓여 있다.

 

 

 

 

 

 상량정 서쪽에 있는 승화루를 “창경궁 궁궐지”에서는 창덕궁 후원 이 주합루에 비견하여 소주합루라 하고, 아래층을 “의신각”이라 하였다.

연경당의 정문과 낙선재의 정문이 다 같이 장락문인 점과 주변의 누각을 주합루와 소주합루라 한 것에서 창덕궁의 주합루와 창경궁의 낙선재와

승화루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주합이란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합루의 아래층인 규장각은 서고로 사용되고 위층은 어진 어제 어필

보책들을 보관하기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선왕의 작품과 동서고금의 책들을 수장하여 시공이 합치되는 건물이라는 이름이 이해가 되나 소주합루가

같은 용도로 쓰였는지는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래층의 이름이 의신각으로 제도의 궁궐이라는 뜻이므로 각종 의궤와 법규책을 보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

순조대에도 “소주합루”라 불리던 건물이 승화루로 바뀐 시점 분명하지 않지만 헌종대에 낙선재를 건립한 뒤로 짐작된다. 건물의 아래층은 현재 전부

개방되어 있으나 동궐도에서는 여기에 방을 꾸민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현재의 돌기둥 아랫부분에 인방이 끼이는 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철거된 것으로 판단된다

 

 

 

 

  

 

 

 

후원입구
낙선재에서 다시 중희당 터를 지나 북쪽으로 진행하면 문이 두 개 나오는데 동쪽문은 창경궁으로 통하는 문이고 서쪽문은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런대 후원으로 들어가자면 한가지 눈에 걸리는 게 있다. 바로 깔끔하게 포장된 포장도로 이다. 이곳은 시민들이 휴식하는 공원이 아닌 말 그대로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보존 공간이다. 이 포장도로는 1960년대 군사정부시절 만든 도로라 했다. 산길을 포장한 덕(?)에 양쪽의 생태계를 갈라놓는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