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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전통정원의 으뜸 - 담양 소쇄원 3 (09. 07. 29)

by 柔淡 2009. 8. 3.

소쇄원의 건물들은 많이 없어졌지만 의미있게 꾸민 조경은 아마 처음 이곳을 꾸몄을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것 같다.

 

광풍각에서 내려와 다리를 건너면 다시 대봉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좌우로는 소쇄원의 상징인 대나무 밭이 펼쳐지고

이채로운 수구, 오곡류 계곡과 외나무다리, 조담과 폭포, 광석, 옥추횡금, 탑암, 상석과 살구나무, 오동나무, 단풍, 창포 등이 있다. 오곡문 옆을 지나온 계곡물은

다섯 번 굽이쳐 오곡류를 이루고, 조담에 잠시 머문 다음 폭포로 떨어진다. 일부의 계곡물은 구멍이 파진 통나무를 지나 연못으로 모이고, 넘친 물은 수차를 돌리며

계곡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크고 작은 두개의 연못이 있다.

 

 

 

 

 이담의 안족으로 들어가면

 대봉대라는 간판이 달린 원두막 비슷한 정자가 있다.

 

「소쇄원도」에 의하면 소쇄원에는 정자가 8개 있는데, 48영의 제 1영에 나타나는 ‘소정빙란小亭憑欄’이란 시제는 어떤 정자를 나타내는가? 광풍각이나 제월당이 정면3칸으로 일반적인 정자에 비하여 적지 않아 소정이라는 의미에 적합하지 않고, 소쇄원 조영초기에 소쇄정, 원정園亭, 소각小閣, 소정, 초정草亭 등의 기록이 있으니 1영의 소정은 광풍각과 제월당을 지칭하는 얘기가 아니라 대봉대 위에 있는 초정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제 1영 ‘소정빙란’에는 소쇄정이란 내용이 들어있다. 1영에 의하여 ‘소쇄원의 경치는 통틀어 소쇄원정이로세, 우러러 보니 시원하고 귀에는 영롱한 소리’라 하여 소쇄원 경치의 중심이 소쇄정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이때는 이미 소쇄원이라 부르던 시기이고 소쇄정이 소쇄정의 중심이 된다는 의미이다.

소쇄정이라는 명칭은 김인후가 가정무자嘉靖戊子(1528)에 읊은 「소쇄정즉사」에 처음 나타나고 송순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송순은 소쇄정을 ‘소각’으로 비유하며, 곁에는 쏟아지는 폭포와 흐르는 개울물과 그 곁에 벽오동나무가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가 1534년에 읊었다는 점에서 소쇄정은 소쇄원에서 제일 먼저 세운 정자인 것 같다. 또한 『유서석록』에 의하면 ‘소재小齋의 남쪽에는 돌을 높게 쌓아올려 그 위에 세운 소정이 있는데 장산張傘같이 날개를 펴고 있었으며, 그 정자의 아래에는 작은 못이 패여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소재’는 광풍각을 나타내며 ‘소정’은 대봉대 위에 세워진 초정을 말한다.

이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시는 송강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이다. 이 시에 의하면 초정은 송강이 태어날 무렵(1536)에 세운 것으로서, 그 곁에는 벽오동나무가 서있고 그 아래는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이는 현재의 대봉대 위에 있는 정자를 말함이고 면앙정이나 하서가 시재에 올린 ‘소쇄정’이나 제봉이 언급한 ‘소정’과도 같은 건물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서 본다면 소쇄정은 양산보 생존시에는 소쇄원을 대표할만한 정자였고 그 창건시기는 1534년, 혹은 이보다 앞선 시기라고 할 것이다.

(좌) 정면
(우) 측면


사방 1칸의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초정 대봉대는 1985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소쇄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 소정은 시원한 벽오동나무의 그늘에 앉아 봉황새(귀한 손님)를 기다리는 집이다. 「소쇄원48영」의 주요한 시점의 하나로 여기에서면 소쇄원의 모든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대를 쌓고 정자(소정)를 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대봉대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봉황새를 기다리는 동대桐臺‘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이로 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또한 입구 쪽으로는 상지와 하지가 있고 바람을 막기 위해 애양단이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48영」중 많은 구절이 적용되는 장소 가운데 한 곳이며, 제 37영 ’동대하음桐臺夏陰’에서 동대 주변의 분위기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동대’란 대봉대를 가리킨다. 이 대봉대의 넓이는 4m×2.5m이다. 현재 대봉대의 초정 옆에 심어진 오동나무는「소쇄원도」에 근거해서 15대손 양재영씨가 최근에 심어 가꾸고 있다. 중국에는 봉황새가 모여 살았다는 봉황새와 봉황산이 많다

 

세월의 무게를 나타내듯 대봉대 옆에는 오동나무와 배롱나무가 심겨져 있다.

 

 대봉대의 지붕위에는 연륜을 나타내는 버섯이 피어났고

 

 대나무숲 옆에는 맥문동과

 자주달개비가 피어 있었다.

양산보나 다른 선인들도 한여름에 이런 꽃들을 즐겼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