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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담양원림의 종가 - 환벽당과 취가정 (09. 07. 29)

by 柔淡 2009. 8. 4.

명옥헌, 소쇄원을 둘러보고 나니 점심시간이다.

소쇄원 주차장 관리인에게 주변 음식점을 물어보니 가사문학관 바로전에 있는 지실 숯불갈비를 가르쳐준다.

점심으로 대통밥 정식을 먹었는데 밥값이 만원인데 비해 텃밭에서 기른 신선한 채소로 만든 다양한 음식이 나왔다.

 

점심을 먹고 다시 찾아 나선곳은 식당에서 바로 건너다 보이는 환벽당과 취가정이다.

이두곳은 다른곳에 비해 설명이 없어 찾기가 다소 어려워 마을 주민들께 여러번 물어보고 나서야 찾을수 있었다.

가사문학관 앞의 다리하나를 사이에 두고 행정구역이 담양과 광주광역시로 나뉘는데 환벽당과 취가정은 광주광역시에 속한다. 

 

환벽당

1972년 1월 29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 : 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林億齡)·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 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려고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노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깨고서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 인근에 취가정, 독수정, 소쇄원이 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사촌 김윤제에게 송강정철은 손주사위이고, 식영정을 만들어 장인어른인 석천 임억령에게 증여한 서하당 김성원은 사촌 김윤제의 조카이면서

송강과 서하당은 함께 공부한 사이이니 환벽당이 식영정과 송강정의 모태라고 할수있겠다.

환벽당이 소쇄원에 비해 조경이나 여러가지 면에서는 뒤떨어지지만 송강의 인물됨을 보고 가르쳐 손주사위로 맞아한 사촌 김윤제의

안목은 높이 살만하다 하겠다.

 

환벽당 입구 

운치있는 돌계단을 걸어올라가면 

 

여기도 배롱나무 고목이 붉은 꽃을 피워내고 있다. 

환벽당 마루에서 바라본 전경 

 

 우암 송시열의 글씨. 소쇄원에도 우암의 글씨가 제월당, 광풍각 등에 남아있더니 여기에도 우암의 흔적이 있다.

 

 

 

 

 

 

 환벽당 뒤뜰에도 오래된 배롱나무가 붉은피를 토해낸다.

 

 

 

환벽당에서 나오면 용소와 조대가 보인다.

용소는 환벽당 및 창계천의 깊은 물 웅덩이를 말하며 이 곳은 송강 정철에 대한 전설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환벽당에서 사촌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환벽당 앞 용소에서 청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이를 괴이히 여겨 하인을 시켜 살펴보라 하였는데 어린 동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 동자가 바로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피신하는 길에 잠시 쉬고 있던 송강 정철이다. 사촌이 송강을 불러 문답하는 중에 그 영특함에 놀라 자기 슬하에 두고 학문을

닦게 하여 송 강 나이 17세에 그를 외손녀 사위로 삼고 정철의 뒷바라지를 했다. 용소옆에는 송강이 이 곳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았다는 조대가 있다.

 

 송강이 낚시를 했다는 조대

 성산별곡의 한귀절이 새겨져 있다.

 안쪽으로 100m쯤 걸어 들어가 오른쪽에 보이는 동산이 취가정이다.

취가정앞 들녁. 8월의 초록색벼가 시원하다.

 취가정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
(고종 27년) 후손 김만식(金晩植) 등이 세웠다. 6·25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5년 재건하였다.

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얕으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는데,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향하여
세웠다. 정자 앞에 서 있는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權糧:1569∼1612)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 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이 능소화는 모함을 받아 죽어간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원한을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