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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그림자도 쉬어가는 식영정과 서하당 (09. 07. 29)

by 柔淡 2009. 8. 4.

가사문학관을 나와 바로 아래에 있는 식영정과 서하당을 찾은 시간은 오후 두시.

데이지는 죽록원과 메타세콰이어길을 보고싶어 안달이지만 내가 전에도 몇번이나 와본 담양을 목적지로 정한것은 이번 휴가때 담양의 원림과 정자,

그리고 가사문학에 대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큰 개념을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식영정에 대해서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식영정을 지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에게 증여한 서하당 김성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편의 환벽당에서 적었듯이 서하당 김성원은 환벽당 주인인 사촌 김윤제의 조카이자 송강 정철의 처 당숙이 되는 관계이며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지만 환벽당에서 송강과 동문수학한 사이이자 평생을 교유한 인간적 스승이자 동지인 사람이다.

 

식영정 

식영정은 원래 서하당 김성원이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각이라 한다. 그런데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란 또 다른 정각을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하였다. 『서하당유고』행장을 보면 「경신 공삼십육세 축서하당우창평지성산 위종노계…(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다.
위 기록에 의하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1560년) 식영정과 서하당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
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에서 공부하던 동문이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 등 성산 일대의 미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
 「성산별곡」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귀봉 송익필 등과 교우
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이 곳은 식영정 외에도 풍광이 수려하여 유상지(遊賞地)로도 이름난 곳이 많은데 자미탄(紫薇灘), 견로암(鵑로岩),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부용당(芙蓉塘),
서석대(瑞石臺)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광주호가 생겨 일대가 많이 변형되었으며 부용당 터에 부용당 건물을 최근 새로 지었다.
송강은 이 성산에서 「성산별곡」이외에도 식영정 20영을 비롯하여 식영정잡영 10수,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차환벽당운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수많은 한시와 단가 등을 남겼다. 정각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 인데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 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깔았다.
 
식영정을 보려면 먼저 서하당과 부용대를 지나야 한다. 몇년전에 왔을때는 폐허처럼 보였는데 서하당과 부용대를 복원해 놓으니 보기가 좋다. 

 

 

 서하당과 부용대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서하당과

 

 

 부용대의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난다.

 

 

 

 

 여름에는 서하당 보다는 부용대의마루에 걸터앉아 연못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차한잔을 마시면 더위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것 같다.

 

 

 

 

 이렇게 부용대와 서하당을 돌아보고 오솔길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들면 50m도 못가서  

 

식영정이 나온다.

식영정 앞뒤로도 어김없이 배롱나무가 만개해 있다. 여기서 잠깐 석천 임억령에 대해 살펴보면

 

석천 임억령 (石川 林億齡, 1496∼156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수(大樹)이며 호는 석천(石川),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해남 출신이다. 임수(秀)의 손자이자 임우형(遇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눌재 박상에게 글을 배웠고 1516년에 진사시, 1525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 설서 등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임백령(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뒤 임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1552년 동부승지, 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77년 62세에 담양부사가 되었다.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다. 

성산(식영정)시단을 열어서 김성원, 정철, 고경명 등의 제자들과 수창했는데 성산동 관련 한시문은 500여 편으로 그 작품성이 뛰어난다. 

남면 지곡리 별뫼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은 1560년 그의 사위인 서하당 김성원이 짓고 석천에게 증여한 정자로 식영정이 있는 별뫼를 무대로 많은 작품을 남겨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 이라 불리루고 있다. 

작품으로 「면앙정삼십영」(1552년), 「식영정 20영」, 「서하당 8영」, 「식영정기」 등을 남겼다. 고맹영과 김성원 등을 사위로 맞았다. 동복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 석천사, 창평 성산사(星山祠, 1795년, 정조 19년 건립)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石川集)』 있다.  

 

또 다른 자료

눌재 박상에게서 수학을 하였던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 ~ 1569)은 1496년 태어나 1568년 생을 마감한 16세기 민중의 정신적 받침목이 되었던 인물이다.

정치에 아첨하지 않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연과 벗하면서 시문과 학문에 진력, 인격과 덕망을 쌓아 忠/孝/悌/信(충/효/제/신) 등 윤리도덕이 충만

했던 고결한 정신의 선비였다.

조선 中/仁/明宗(중/인/명종)시대 석천 임억령을 선비중 선비로 꼽는 이유는 벼슬을 버리고 성산계곡에 은둔, 처사로 들어와서 선비정신을 그 스스로 실천에

옮겼을 뿐만 아니라 시(詩)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선생의 인생 철학, 사상과 문학이 다른 선비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석천은 중종 11년 진사시험에 급제하고 9년뒤 문과에 등제한 후 옥당, 의정부 사인 등 관직을 두루 거친다. 1540년에는 전서로 승진했고 그 이듬해 사간원, 대사헌

을 두루 거치며 백성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강력히 주청하는 정치론을 펴기도 한다.

 

생활근거를 고향에 옮긴 후에 광주, 나주 출신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양팽손, 나세찬, 김인후, 임형수, 기대승, 정철, 고경명 등과 각별하게 지냈다. 이들 선비

들과 교유하면서 품어낸 고결한 인품과 예술사상은 석천집 11권에 전하고 있다.

석천의 시 세계는 대체로 사실적이기보다는 낭만적 경향이 농후하며, 시 형식은 칠언시 보다는 오언시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율시보다는 절구쪽이 훨씬 많다.

일반적으로 오언시보다는 칠언시가 복잡하며 까다롭다. 석천이 오언시 형식을 선호하고 특히 칠언율시를 기피한 것은 시 경향 형식의 구애를 가능한 탈피하고

자연스러움의 미를 지향하려는 성격 때문으로 여겨진다.

식영정은 그가 은거하면서 시작에 전념할수 있는 좋은 처소로서 역할을 했으며, 그곳에서의 시작활동을 본 받은 송강 정철이 한글로 된 성산별곡을 지을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원래 주인은 석천임억령인데 제자인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솔숲을 통해거 광주호가 내려다 보이고

 풍경을 바라보는 여인네들이 한가롭다.

 

 

 

 

 

 왼쪽으로는 수백년된 노송이 위엄을 자랑하고

 

 입구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운치있다.

 

 

  

 계단을 돌아 내려오다 보면 부용대의 또다른 모습이 보인다. 

 

송강정철의 가사문학비가 서있고 

 안내판이 서있다.

 

 길을 건너 광주호를 바라보면

 

 좌측에 있는 사발 모양의 봉우리에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다.

 이렇게해서 광주호 주변에 있는 명옥헌- 소쇄원 - 환벽당과 취가정 - 한국가사문학관 - 식영정과 서하당을 둘러보고 담양읍내 쪽으로

송강정과 면앙정을 보러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