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광주·전라

가사문학의 으뜸 - 송강정 (09. 07. 29)

by 柔淡 2009. 8. 5.

광주호 주변에 몰려있는 명옥헌 - 소쇄원 - 환벽당과 취가정 - 한국가사문학관 - 식영정과 서하당을 둘러보고 다음 목적지인

송강정과 면앙정을 찾아 길을 떠났다.

송강정과 면앙정은 광주호에서 창평을 지나 담양읍내로 가는 길목에 있다.

 

송강정

송강 정철은 선조 17년(1584)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들이 합세하여 서인울 공박함이 치열해지자 마침내 양사로부터 논척을 받아 부득이 다음해 조정을 물러나자 이곳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을 평범한 인간으로서 또한 시인으로서 조용한 은거생활을 했다. 여기서 그는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썼던 것이다.
송강별집 권칠 기옹소록에 「전후사미인곡 재차향(창평) 시소작불기모년 사시정해무자년간이(前後思美人曲 在此鄕(昌平) 時所作不記某年 似是丁亥戊子年間耳)」이라는 기록을 보면 양사미인곡(兩思美人曲) 제작은 창평(昌平)으로 돌아온 해(1585년)로 부터 2∼3년 뒤가 된다.
「사미인곡(思美人曲)」은 제명 그대로 연군지정을 읊은 노래다. 그 수법은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사모하는 정을 기탁해서 읊은 것인데 송강 자신의 충정을 표현한 노래라 하겠다. 심각한 실의에 빠져 있었던 때이라 송강은 이때 세상을 비관했고 음주와 영탄으로 이곳에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송강의 은거와 인연이 있는 송강정의 건물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전면과 양쪽이 마루로 되었고 중앙칸에 방을 배치하였다. 정각 바로곁에 1955년에
건립된「사미인곡(思美人曲)」 시비가 있으며 현재의 건물 역시 그때 중수된 것이다.

 

정철 (鄭澈, 1536년 ~1593년)은 조선의 중기의 시인이자 문관(文官)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

이다. 돈령부 판관(敦寧府 判官) 정유침(鄭惟沉)의 아들이다.[1] 기대승(奇大升) · 김인후(金隣厚) · 양응정(梁應鼎)의 문인이다.

 

153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인종의 귀인(貴人)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 때문에 궁중에 출입하고, 어린 경원대군(慶原大君 :

명종)과 친숙해졌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一族)으로서 아버지가 유배될 때 배소에 따라다녔다.

1551년(명종 6) 특사되어 온 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이주, 여기서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 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하면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서 사사(師事)하였고, 이이·성혼 등과도 교우했다.

 

1561년(조선 명종 16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듬해 27세로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인 1567년(명종

32년)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를 하였다.

1568년(선조 1) 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고 1575년(선조 8)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8년 장악원정으로 기용되고, 사간·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어, 그 후 3년 동안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지방 장관으로서보다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그의 천재적

재질을 나타낸 작품을 썼다. 그의 최초의 가사관동별곡〉은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하고 또한 고사(故事)·풍속까지

삽입한 것이며, 〈훈민가(訓民歌)〉 16수는 백성을 교화(敎化)할 때 포고문이나 유시문을 대신하여 시조(時調)의 형식을 빌려 지은 것이다.

1583년(선조 16) 예조 참판이 되고, 이어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논척(論斥)으로 다음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가사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선조 22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들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

(선조 24년) 건저 문제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때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어 명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진주(晉州)로 이배 된 뒤 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하였다. 일본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충청·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평양을 되찾은 뒤 복귀하여 삼경(평양, 개성, 서울)을 회복한 일에 대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쟁이 계속되던 중에 사은사와 관련된 일로 동인들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그해 12월에 사망하였다.

 

 송강정

 송강정에 오르는 돌계단

 

 

 정자와 배롱나무가 잘 어울린다.

 

 

 

 죽록정이라는 현판도 한족에 붙어 있는데 이곳의 지명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