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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대한민국의 승리가 시작되는곳 울돌목, 2009 명량대첩축제

by 柔淡 2009. 9. 17.

올해 10.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열리는 2009 명량대첩축제장을 전남도청과 해남군의 안내로 미리 돌아보았다.

 

"대한민국의 승리가 시작되는곳, 울돌목" 이라는 컨셉으로 열리는 금년도 명량대첩축제는

  • 기 간 : ‘09. 10. 9(금) ~ 10. 11일(일), 3일간
  • 장 소 : 전남 해남군 우수영관광지, 진도군 녹진관광지 일원
  • 주최/주관 : 전라남도·해남군·진도군, (재)명량대첩기념사업회
  • 후 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해군
  • 행사 구성 : 메인행사, 기획행사, 부대행사 등

으로 예정되어 있다.

 

명량대첩의 역사적 배경은

  • 선조 30년(1597년) 7월 7일에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의 칠천량 해전에서 400여명이 전사하고 200여척의 전선이 12척이 남게되는 대참패를 겪음.
  • 7월 23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재임명하여 수군의 재건을 맡김.
  • 최악의 여건이었지만 이순신은 8월 3일부터 8월 17일까지 전라도 남방 330여km를 우회하여 부임하면서 병력과 군량 및 무기를 갖춤.
  • 이 결과 패잔 전선 12척을 수습하고 전라우수영에 계류중이던 전선 1척을 포함하여 총 13척의 전선으로 무장함.
    ※ 명량해전과 관련 사료마다 12척, 13척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은 모두가 틀린것이 아님.
  • 8월 19일 회령포에서 승선하여 명량 방향으로 후퇴하면서 4회에 걸쳐 왜 수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왜 수군을 유인하여 섬멸하는 계획을 수립.
  • 8월 29일 명량 입구에 위치한 벽파진에 주둔함.
  • 9월 15일 벽파진에서 싸움이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우수영으로 진을 옮김.
  • 9월 16일 양도 앞바다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상대로 명량 대첩을 거둠.

그 의의는

 

  • 명량대첩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 이후 수륙병진 전략으로 호남을 석권하고 한성으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의도를 좌절시킴으로써 정유재란의 흐름을 뒤바꾸었음.
  •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막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안을 무인지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강과 대동강, 압록강까지 도달하게 되어 명의 지원을 단절시키고 조선을 점령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에 명량해전 승리는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함.
  • 이순신이 불과 13척으로 133척이나 되는 일본의 함대를 격멸한 것은 그의 뛰어난 전쟁 지휘 통솔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례이며 의로운 전라도민들의 구국정신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됨.

울돌목 해안에 서 있는 "고뇌하는 이순신 장군" 님의 동상 (만조시)

 간조시.

 해남군 우수영관광지에 도착하면 이런 대문이 제일먼저 관광객을 맞는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고 세계 3대해전으로 꼽히는 명량대첩을 소개하는 대문치고는 너무 허술하고 격이 맞지 않는다.

하긴 원래의 우수영은 여기가 아니라 동북쪽으로 3km 떨어진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비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

 

이 말은 이 충무공 전서의 끝 부분 부록 서한문(書翰文)편에 있는데 사헌부 지평 현덕승(玄德升)에게 이순신 장군이 편지 답장을 쓰는 내용 중에 언급된

것입니다.

이 편지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7월16일자이며, 김천일 의병장과 호남의 제장졸(諸將卒)들이 진주성 제2차

혈전에서 모두 순절했던 6월29일을 약 보름 지난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순신장군님이 어떤 연유로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 라는 비유의 표현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 호남 의병의 역할
둘째, 호남곡창의 군량미의 보급 역할
셋째, 해전을 승리로 이끈 휘하 장병이 모두 호남출신이라는 점

임진란 시의 의병은 대부분 향토 방위전이었다면 호남 의병만은 국토 방위전에 참가하여 서울 수복과 진주성 전투 참가 등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점을 이순신이

그리 말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순신 장군 어록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해남출신 충혼비 

명량대첩탑 

 

 

 전시관

 

 매주 토요일 열리는 우수영관광지 공연중 하나인 수문장 교대식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동안 열리는 축제의 프로 그램은 아래와 같다.

 

일정

시간

10,9(금)

10.10(토)

10.11(일)

10:00

전남민속예술

경연대회

강강술래 경연대회

도립국악단 공연

“명량의 북소리”

11:00

해전재현

13vs133

12:00

키다리 수문장 교대식

13:00

약무호남제례

키다리 수문장 교대식

김훈의 역사하교

14:00

초요기를 올려라

백의종군 랠리 입성식

울돌목 바다쇼

(수상 오토바이 외)

15:00

약무호남 입성식

약무호남 입성식

위령 씻김굿

도립국악단 공연

“명량의 북소리”

16:00

소다섯마리

만가행진/평화노제

17:00

난장콘서트

해전재현

13vs133

18:00

야죽불 황토고구마

평화행진 길놀이

풍등 날리기

19:00

풍등 날리기

풍등날리기

 

20:00

인디밴드 페스티발

명량의 밤

 

 

참고로 전남도청에서 제공한 작녀도 사진을 보면 13척으로 왜군 133척을 물리친 해전을 재현하고

 

 

 

 

진도의 만가행진 상여를 재현한다.  

 

 

행사장의 지도는 아래와 같다. 

 

 

주요행사가 열리는 진도대교 . 당일은 쌍동이 대교중 한쪽을 차량을 완전히 통제한다.

 

 

 

 우수영관광지 뒤쪽으로 3부쯤 가면 가면 충무사가 있는데 여기는  충무공의 명량대첩비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충성심과 구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이다. 명량대첩 비 와 충무공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충무사에 세워진 명량대첩 비 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정유년(1597) 9월 16일 우수영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 을 기록한 것인데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숙종 14년 3월에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그런데 2차대전을 유발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왜란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그 비(碑)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그래서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인 경찰들이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고 말았다.

이 일로 인부가 죽고 목수 두 사람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자 감히 실행을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뒷들에 파묻어 버렸던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有志)들은 대첩비를 찾기 위한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경찰부와 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파묻혀 있는 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첩비를 우수영 으로 옮길것이 막연했다. 이들은 미군정청(美軍政廳)에 면담을 요청하여 협조를 구해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겨 목포까지

열차로, 목포에서 다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그러나 비(碑)를 세울 장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각(祭閣)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으나 턱없이 부족한 기금 때문에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기도 했고 대첩비를 수백장 탁본하여 여러 시와 학교 관공서를 돌아 다니며 팔기도 했다. 드디어 1950년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학동으로 자리를 옮긴 명량대첩 비 는 최근 두 차례나 믿지 못할 영험이 나타났다. 국가의 대난이 예상될 때면 땀 흘리듯 검은 물이 흘러나와

나라의 장래를 근심한 충무공의 충절이 살아난 것이라고 한다. 1950년 6·25사변과 1980년 5·18민중항쟁 때 이 비는 두 번 우국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명량대첩 비 는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 66년에는 사당이 지어졌다. 그후 75년 성역화를 위한 조경사업을 시작해 충무공 탄신일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한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매년 4월 28일 제향(祭享)하고 있다.

 원래의 전라 우수영 자리

지방기념물 제139호 (92.3.9)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조 세종 8년(1426년)에 설치 고종 32년(1895년) 폐쇄까지 약 50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지켜온
해군기지이다.
전라우수영성지는 기념물 제139호이며 위치는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1161외이며 시대는 조선시대(1927) 전라우수영의 설치는 고려말 우왕 3년(1377)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뒤 세종22 (1440) 해남 황원곶(현 위치)에 이를 이설,

 

 작년부터 운항되는 거북선 모형 선박

 이배를 타면 우수영을 떠나 어란진, 벽파진을 보고 다시 선두리 우수영 선착장으로 돌아온다. 

 거북선 용머리에서 구름을 토해내는 모습을 찍어보려 했는데 잘 안됐다.

 해류가 시속 12놋트 (24km)로 흐르는 울돌목 수로

 임진왜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우리나라에서 가장큰 이순신장군 동상

 

 400여년전 전함 13척으로 왜군 전함 133척을 침몰시킨 그자리엔 지금은 해류를 이용한 조력발전 시험시설이 세워져 있다. 

 그당시 왜군 전함이 공격해 왔던 울돌목 수로

 벽파진은 바로 그 명량대첩을 거두기 직전 16일 동안 이순신이 머물면서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안위를 고민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을 숙고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비석의 높이는 11m이며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 있으면서 명량해협을 굽어보고 있다. 이곳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고려 삼별초의 근거지

였던 용장산성 행궁터가 나온다. 용장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이곳에서 몽고군에 맞서

싸우다 남도석성으로 밀려가고 끝내는 제주도로 건너간다

 다시 우수영관광지로 돌아와 저녁노을이 물드는 진도대교를 바라본다.

 

 1597년 음력 9월 13척의 전함으로 왜군 전한 300여척을 막아내야만 했던 이순신 장군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꾼들은 사리사욕만 앞세우고....

수많은 목숨이 수장된 울돌목엔 진도대교가 놓여졌고 그당시 억울하게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혼령들은 말이없다.

 

아름다운 야경을 보여주는 진도대교는 그 혼령들의 울부짖음 을 저녁마다 듣고 있을까? 

 

 

□ 명량대첩축제가 타 축제보다 가보고 싶은 이유

  ① “해운대”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스펙타클한 해상전투 등

       충무공과 대첩관련 축제들에 비하여 재현에 충실하고 규모가 대단하다. 충무공 관련 전국축제를 보면 진해 군항제, 아산 성웅 이순신축제, 통영 한산대첩

       축제 등이 규모가 큰 축제로 손꼽힌다. 그러나 명량대첩축제는 바다를 조망하면서 감동을 전달 받을 수 있는 자연적인 무대가 있다. 명량해협을 바라보는

       3,000석의 해변무대는 마치 거대한 관람석에 앉아서 재현모습을 실전을 보는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재현행사에는 주민의 어선 100여척이 출전하고 약무호남 입성식에도 3,000여명이 행렬한다. 최솔 총감독은 “극장에 앉아서 영화를 보듯 자연무대에서

       영화감독이 만든 영화보다 더 리얼하고 감동이 있는 412년 전의 승첩장면을 만들어 내겠다”고 밝혔다.

  ② 주민들이 만들어 가는 축제

     약무호남 입성식, 해전재현, 만가행렬, 초요기를 올려라 등은 주민들이 만들어 가고 참여하는 메인 프로그램이다.

     해전 전함에 참여하고 있는 어란의 어선 20여척의 경우 3시간이나 걸려 배를 몰고 와서 해전에 참여하는 등 100여척의 해남 어선들이 참여하고, 만가에도

      500명이 넘는 진도군민들이 참여하게 된다. 또 초요기를 올려라 에서는 786개 해남, 진도 전 마을의 깃발들이 참여하게 된다.

      이밖에도 야죽불 체험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여 고구마도 가져와서 굽고, 체험 하게 한다. 

  ③ 전국 유일의 바다위에서 즐기는 축제

     명량대첩축제가 펼쳐지는 곳은 물살 빠르기로 소문난 명량해협이다. 이 가파른 물살위로 진도대교가 있다. 명량대첩축제는 진도대교에다 소공연과

    휴식, 볼거리 공간을 꾸밀 계획이다. 이 다리를 지나면 마치 조선시대로 들어 온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진도만가 공연, 충무공과 수군들을 수시로

     출현시키고, 곳곳에 포토죤도 운영 하는 등 축제를 마음껏 즐기는 450m의 명소로 만들겠다는 축제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해남의 명량무대와 진도의 녹진무대를 넘나들면서 물살 빠른 바다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바다도 보고, 체험도 하고, 공연도 즐기는 색다른 축제, 특히

     진도대교 위에서 인디밴드, 저글링, 마임 등의 다리 위의 가을공연 기획 자체가 신선하며, 오래토록 관광객 이미지에 각인될 것이다.

   ④ 기억에 남는 대규모 공연

     도는 올해의 명량대첩축제는 관광객 편의는 대폭 보강하며, 역사축제의 웅장함은 살리고,  재미는 늘리는 축제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2008년에

     외빈으로 참여했던 “칼의노래” 김훈 작가가 올해는 고문역을 흔쾌히 받아 들였다고 한다. 또 연출은 최솔  전국연극인협회 사무총장이 맡아 영화와

    연극을 접목하는 축제를 만든다.

    주말에 명량대첩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은 금세기에 볼 수 없는 진기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직접 눈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명량해전 재현광경은 영화관이 아닌 곳에서도 이렇게 생생하고 큰 장면으로 감동을 줄 수 있구나 하고 느낄 것이며, 8기의 상여와 500개가 넘는 만장행렬은

       평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할 것이다.

 

                                                                                            2009명량대첩축제가 09년10월9일 금요일부터 10월11일 일요일까지 해남군 우수영관광지와 진도군 녹진관광지 일원에서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