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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이순신 장군의 혼이깃든 충무사와 전라 우수영 (09. 09. 12)

by 柔淡 2009. 9. 18.

진도대교 입구 좌측에 있는 우수영관광지에서 해남쪽으로 차로 3분정도 가면 충무공의 명량대첩비가 있는 충무사가 나온다.

 

충무사 소개

 

충무공 이순신의 충성심과 구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이다. 명량대첩 비 와 충무공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충무사에 세워진 명량대첩 비 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정유년(1597) 9월 16일 우수영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 을 기록한 것인데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숙종 14년 3월에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그런데 2차대전을 유발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왜란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그 비(碑)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그래서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인 경찰들이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고 말았다.

이 일로 인부가 죽고 목수 두 사람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자 감히 실행을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뒷들에 파묻어 버렸던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有志)들은 대첩비를 찾기 위한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경찰부와 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파묻혀 있는 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첩비를 우수영 으로 옮길것이 막연했다. 이들은 미군정청(美軍政廳)에 면담을 요청하여 협조를 구해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겨 목포
까지 열차로, 목포에서 다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그러나 비(碑)를 세울 장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각(祭閣)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으나 턱없이 부족한 기금 때문에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기도 했고 대첩비를 수백장 탁본하여 여러 시와 학교 관공서를
돌아 다니며 팔기도 했다. 드디어 1950년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학동으로 자리를 옮긴 명량대첩 비 는 최근 두 차례나 믿지 못할 영험이 나타났다. 국가의 대난이 예상될 때면 땀 흘리듯 검은 물이 흘러나와
나라의 장래를 근심한 충무공의 충절이 살아난 것이라고 한다. 1950년 6·25사변과 1980년 5·18민중항쟁 때 이 비는 두 번 우국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명량대첩 비 는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 66년에는 사당이 지어졌다. 그후 75년 성역화를 위한 조경사업을 시작해 충무공 탄신일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한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매년 4월 28일 제향(祭享)하고 있다.

<참고문헌>
해남문화유적도록, 해남문화원, 황도훈, 1995.
해남의 고대문화와 그 사회, 황도훈, 해남문화원, 1995.
해남, 정윤섭, 향지사, 1997.

명량대첩비 

 

 

 충무사 전경

 

 

 

 충무사 입구

 

 충무사로 올라가다 보면 우측에 역대 전라우수사들의 공덕비가 있다.

우수영성지
지방기념물 제139호 (92.3.9)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조 세종 8년(1426년)에 설치 고종 32년(1895년) 폐쇄까지 약 50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지켜온
해군기지이다.
전라우수영성지는 기념물 제139호이며 위치는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1161외이며 시대는 조선시대(1927) 전라우수영의 설치는 고려말 우왕 3년(1377)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뒤 세종22 (1440) 해남 황원곶(현 위치)에 이를 이설,  세조 11년 (1465)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개편되었다.
성종 10년(1479)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영역은 원문내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이었다. 영성(營城)은 석축 둘레 2,843척, 높이 11척, 여첩 607개, 호지 3개소가 있었다.

『전라우수영지』(1787)에 의하면 영내의 민호는 620호, 수군 장졸의 병력은 1,085명을 보유하였다. 한편 본 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임란 이후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나주·영광·함평·무안·영암·해남·진도 등 7관을 속읍으로, 관내의 속진으로는 금갑도·남도포·어란진·고금도·신지도·
마도진·목포진·이진진·다경포·법성포·임치진·지도진 ·주도진·금모포·고군산·선산진·흑산도·청산진·가리포 등 19진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 만큼 전시에 있어서 본영의 군사적 규모와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전라우수영의
군비로는 관사로서 내아 제승당 등 26개소의 각종 당청과 중요시설로 선청과 집회소 또는 회의장소로 이용된 12개소의 누정이 있었다. 중요시걸로 선창을
두었는데, 성남문밖에 석축으로 만든 4개소의 항구 시설이었다.

군선으로는 전선 2척·귀선 2척·해골선 ·방골선이 각 1척·병후선 8척 등 모두 17척을 보유, 여기에 사부·화포수·타공·웅고·기라졸 등의 수군을 배치하였다.
수군절도사는 무관 정3품이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본영의 수사 김억추는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명량대첩 을 거두었는데, 명량은 본영 선창으로부터 불과 5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급조류의 해협의 천험의 관방을 이룬 곳이다.

우수영의 축성은 설치 위치로는 해안성, 축성재료로는 토성과 석성의 혼합성, 평면형태로 사각형과 원형의 중간형태인 부정형성, 축성방법으로는 편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돌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아랫쪽은 150㎝ 이상이 되는 것들도 있으나 올라가면서 50㎝에서 30㎝정도로 작아진다.

<참고문헌>
명량대첩 기념공원, 해남군 
 

충무사입구에서 바라본 원래의 전라우수영터. 시간이 없어 직접가보지 못하고 먼발치에 바라보기만 했다.

 

 

                                                                                            2009명량대첩축제가 09년10월9일 금요일부터 10월11일 일요일까지 해남군 우수영관광지와 진도군 녹진관광지 일원에서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