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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정조의 효심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은 수원화성 2 (09. 10. 04)

by 柔淡 2009. 10. 7.

화성을 순환하는 코끼리열차가 연무대에서 출발해서 장안문을 거쳐 서장대쪽으로 가는데 3시반인데도 불구하고

제일 마지막 열차인 5시20분것 까지도 매진이 되었다.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특히 좋아하는것 같다.

할수 없이 걸어서 장안문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원래는 야경가지 찍고 싶었지만 데이지가 힘들다고 함께오지

않아서 혼자 뻘쭘하기도 하고 배도 고파서 세시간 정도 성곽을 거닐다 달만 찍어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화성축조의 역사적 배경 (화성홈피 참조)

역사적배경원행을묘정리의궤물자조달임금지불거중기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 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던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유택(幽宅)인 영우원(永祐園)을 1789년(정조13)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당시 지명은 신기리(新機里))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

('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따르면 244호-인구 677명)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 눠주었다.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 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지세(地稅)와 부역을 감면해 줬으며, 환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의 초대,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 하사, 문ㆍ무과 별도 과거를 통한 지역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

특별과거인 별시는 정조대왕의 능행차 때마다 실시됐는데 수원과 인근의 유 생, 한량, 군인, 무사 등이 응시하도록 특별 배려했다. 특히 1795년

(정조 19)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 열렸던 해의 능행차 때에는 임금이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과거를 실시, 문과 5인, 무과 56인의 급제자를 선발

하기도 했다.
그런데 1790년(정조 14)에 실시한 과거 때는 합격된 사람 들 중 3명이 수원 호적자가 아님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고, 이들을 징벌 해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이 있었으나, 정조대왕은 합격만 취소 시키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일도 있었다. 최홍규 교수에 따르면 "수원과 인근

지역민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매년 실시 되는 이 문·무과 특별 과거시험을 통해 관계(官界)와 군(軍)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고장 백성들은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 과정을 통해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도 그만큼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시를 이전하고 행궁 등 관아 건물을 지을 때, 또 화성을 축성할 때 예전과는 달리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꾼을 모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예전에는 강제 징발된 부역군들이 공사를 맡았었다. 조정 대신들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 하자고 건의

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했다.
그 결과 수원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을 차질 없이 진행 할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정조대왕은 행정·군사·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춘 수원을 건설하기 위해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꾸어주면서 공업과

상업을 촉진, 18세기 말 대도회·상업 도시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때 수원의 제지 수공업 발전을 위해 4천냥의 금융

지원을 통해 북부면 지소동(현재 팔달구 연무동)에 제지공장을 차렸으며, 팔달구 우만동 봉녕사는 두부제조를 전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장은 팔달문 밖의 남시장(일명 성밖시장, 현 영동시장)과 북수동의 북시장(일명 성안시장)이 섰다. 이렇듯 정조대왕의 애정과 특혜 덕분에

수원에는 많은 외지인들이 이주를 해오는데 특히 해남에 거주하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수원으로 이사를 해와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북부 보시동(현 북수동)에 형성된 8부자집은 전국에서 이주해 온 상공업자들이 상업활동을 벌인

곳이다. 이 때 서민과 소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해 줬다고 해서 보시동(普施洞)이 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정조대왕이 상공업 뿐만 아니라 농업 진흥 정책도 적극 추진하였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둔전을

일굼으로써 오늘날 수원이 농업과학교육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수언화성의 꽃, 동북각루 (방화수류정)

동북각루는 벽성의 서북 19보 용연(龍淵)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1면을 제압하고 있다. 그리고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다.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 씀]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남쪽 동쪽 북쪽의 3모퉁이에는 5번 꺾인 팔각(八角)으로 각각 종횡의 짧은 대들보를 얹었다. 지붕 용마루의 네모진 서까래가 들쭉날쭉하여 처마를

번쩍 들고 있으며 지붕 용마루에는 망새[鷲頭]를 교착시켜 꽂았는데, 한 가운데에 3마디 절병통(節甁桶)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다.
동북쪽 평난간 밖에는 또 처마마다 판자를 깔아 성두(城頭)를 위압하고 있다. 2중으로 교란(交欄)을 설치하고 밖에는 전붕판문(戰棚板門) 16개를

설치하였는데, 만듦새는 마치 병풍을 포개어 친것 같다. 위에는 전안(箭眼) 각 1개씩을 내고, 아래에 총안 각 2개씩을 뚫었다.
단청은 5토를 사용하였으며,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내면에는 절지(折枝)를 그렸고, 정간(正間)의 조정(藻井)에는 연잎[荷葉]을 받쳤다.
동북 교란 아래의 성면 벽돌 높이 7척, 두께 4척 4촌, 위 아래에 총안 19개를 뚫고 널판지를 깔았다.

아래의 서남에도 벽돌을 돌려쌓아 담을 치고 담의 남쪽에 벽돌 홍예의 작은 문을 내었다.
동쪽의 물림난간 아래에도 판문을 내고 숨었던 적병의 발사에 대비하여, 포루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정간 남쪽 처마와 층계로 누대를 만들되 돌을

깎아서 가장자리를 둘렀다. 누대의 높이 4척, 남북의 길이 13척 4촌, 동서의 너비 16척 4촌이다. 위에 방전을 깔아 우사(射)와 읍양(揖讓)의 예를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을 유지시켰다. 대 위의 서북에 각각 고란층제(高欄層梯)를 놓아 정자의 위로 통하게 하였다. 대 아래의 동남 양면에도 4층 보석

(步石)을 설치하고 그 남쪽 11보의 거리에 낮은 담을 쌓고 전문(箭門)을 내었다. 용연(龍淵)은 북성 밖에 있는데, 모양이 반달 처럼 생겼다.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고, 가운 데에 작은 섬이 있다.
못위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 내게 되어 있다.

 

 

 

 화홍문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그 동서로 3간은 아래 너비가 8척 높이가

7척 8촌, 가운데 한 칸은 너비가 9척, 높이가 8척 3촌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의 전석에서부터 다리 밑까지 높이는 8척 7촌, 다리의 두께는 1척 9촌이다. 장대는 높이 1척이고 다리는 너비가 31척 길이 95척이다. 장대 위에는

누조(漏槽)[각각 너비 1척 깊이 5촌] 7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첩을 설치했으며, 타구는 설치하지 않았다. 높이는 5척 4촌 두께는 4척 8촌

이고,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서쪽 기둥의 북쪽과 동쪽 기둥의 동쪽에는 짧은 담을 쌓고 전판문(箭板門)을 설치하여

동쪽 성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다리 위 북쪽 편에 누각 6간을 지었는데, 동서로 가로 너비가 3간이고 남북으로 세로 길이가 2간이다. 모두 널빤지를

깔았는데 첩의 위로 높이 솟아나오게 하여 사면에 분합을 달고 동서남 삼면에는 연잎을 새긴 난간을 붙였다. 난간 아래에는 벽돌을 둘러서 담장을

만들고 남쪽 한 가운데 1간을 비워서 들고 나는데 편하게 하였다.

방사(放射)하는 제도는 포루와 같다. 다리 위에서 널판지 깐 데까지 높이가 6척 2촌이다. 북쪽 분합 밖으로 물려깐 널위에는 전붕(戰棚)을 설치하였고

판문 아래에는 벽돌로 된 첩과 이어지게 하였는데,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총안(箭銃眼)을 뚫었다. 단확은 녹색을 바탕으로 하고 진채(眞彩)

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누 남쪽 다리 위의 길은 너비가 5척이고 다리 아래 7개의 홍예에는 각각 쇠로 만든 전문(箭門)을 설치하였다. 줄로 양선

(兩扇)을 걸어 당겨서 교면(橋面)의 석안(石眼)까지 꿰뚫고 지나가게 하였으며, 거기에다 고리를 설치하고 자물쇠를 달았다.

문 안의 양쪽 석축은 각각 길이가 6보 높이가 4척 5촌이고, 문 밖의 석축은 각각 길이가 5보 높이가 5척 5촌인데, 위로 성의 몸체와 이어져서 전체 높이는

16척이다. 이것이 실지로 내의 동쪽과 내의 서쪽이 서로 마주 서서 휘어 꺽여 원성(元城)이 되었다.
두 끄트머리는 전붕과는 좌우로 각각 29척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또 좌우의 벽돌로 된 첩 위에 타구가 셋인 여장을 설치하여 담과 이어지게 하였다.

높이는 각각 4척 4촌이고 두께는 2척 2촌이다.

 

 

 

 밑에서 올려다본 방화수류정

 

 

 장안문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행궁의 왼쪽 편인데 동쪽으로 780보되는 곳에 사좌(巳坐) 해향(亥向)으로 앉았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 너비 16척 2 촌,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성석이 크고 잘 다듬어진 것으로 문 옆의 석면(石面)이 된 것을 무사라 한다]는 각각 아래 너비가 67척 8촌, 높이가

23척 5촌, 왼쪽과 오른쪽의 와장대(臥長臺)는 각 32척 4촌, 섬돌은 각 23층 너비는 17척 2촌이다. 바깥 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 높이가

23척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홍예의 덮개

판에는 구름 무늬를, 그리고 판 위에는 세 가지 물건[석회, 가는 모래, 황토]으로 쌓았는데, 두께는 4촌이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너비 1척 깊이 5촌]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안쪽의 평여장(平女墻)은 너비 88척 7촌, 높이 4척 3촌, 두께 2척 5촌이고 바깥 쪽 여장의 높이 두께도 같으나 너비는 동서장 밖으로 각각 7척 4촌이

나왔다. 이 부분에서는 높이가 6척이 되어 옹성 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며 타구(口)는 10개[첩(堞)은 11개]를 벌여 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개[네모의 한 쪽 길이는 8촌이며, 첩마다 1 개를 뚫었고, 가운데에 있는 1개의 첩에는 2개의 총혈을 뚫었음]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은 너비

3척 5촌, 높이 5척 6촌, 중앙에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는데 높이는 6척 5촌 너비는 6척이다. 장(墻) 안에는 2층의 누를 세웠는데 전체 높이는 32척 9촌,

아래 위 각각 10간(間), 가로 너비는 5간 세로 길이는 2간이다.
아래 층[안은 7포, 바깥은 5포] 정면 간의 너비는 22척 5촌인데, 바닥[높이 1척]에는 널판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둘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이며, 세로 길이 2 간이고 전체 길이가 24척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간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간에는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서쪽 층계 아래에 살문[箭門]이 있는데 잠가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에는 연다].
위층[안팎 모두 7포]은 정면의 간과 좌우 협간은 너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이며, 그 세로가 2간 전체 길이는 18척인데

모두 널판지를 깔고, 사면에 널판지 문을 달았다. 그리고 3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려 호로전안(葫蘆箭眼)[널판지마다 구멍이 하나씩 있는데

경(經)이 3촌 직봉(直縫) 역시 3촌이다]을 뚫었는데 안 쪽에는 태극을 그렸다. 단확(丹)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으며 문 안 서쪽

가에는 수문청을 별도로 세웠다.[협도(夾刀) 넷을 세웠다]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위에 적루

(敵樓)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정문 좌우의 무사에서 각각 7보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벽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17척 안쪽 둘레는 159척 6촌 바깥 둘레는

209 척이고, 아래는 두께가 15척이고 위는 줄어 들어서 12척이다.

바깥 쪽에 현안(懸眼) 16개를 뚫었다[각각 길이 2척, 지름 2척 2촌]. 안 쪽에 벽돌로 된 홈통 8개[지름 각 5촌]를 설치하였다. 옛 제도에는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한쪽 문만을 열었으나 지금은 사방으로 열리고 팔방으로 통한다는 뜻을 취하여 중앙에 문을 설치하여 정문과 마주하게 하였다. 양문의

사이는 10보 3척이며 돌로서 안팎으로 홍예를 만들었다.

안쪽의 홍예는 너비가 18척, 높이 19척이고 바깥 홍예는 너비가 16척 높이가 17척 5촌이며 안팎 홍예의 사이는 좌우 높이가 21척이고 양 선문(扇門)

안에는 쇠로서 빗장이 설치 된 것이 정문과 같다. 홍예의 덮개판 위는 세 가지 물건으로 쌓고, 다시 여러 장의 벽돌로 쌓았다. 그 위에 오성지(五星池)

[『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升)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때 물을 내려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오성지 위에는 성가퀴 9첩을 설치하였는데,

전체 너비 38 척이고, 그 좌우는 1층을 낯추어서 凸 모양의 성가퀴 7첩을 설치하였다. 너비는 각각 10척 2촌이며 높이는 모두 5척이다.

성과 만나는 곳에서 다시 凸의 반쪽 모양으로 층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9척으로 각기 총안을 1구멍씩 뚫었다. 안쪽은 둘레가 평평한 여장으로 높이는

3척 5촌, 두께는 모두 2척 6촌이다. 옹성 위는 모두 네모난 전()을 깔고 좌우 끝에는 벽돌로 된 홍예에 작은 판문을 설치하여 성의 위와 통하게 하였다.

문의 양 옆은 평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10척 7촌이다.

북성의 적대는 2개로서, 각각 장안문의 좌우 53보 되는 곳에 있다. 옛 제도에는 70보 되는 곳에 1대를 세우고, 활화살 화창(火槍)을 대 위에 갖추어

둔다고 하였다.

성서에는 지금의 성은 화살과 탄환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비록 창이나 선()으로 위로 찌른다 해도 전체 높이가 여유가 있고, 대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적이 곧 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또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비스듬히 날아오는 탄환도 대위에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대략 이 제도대로 하면 대의 높이는 2척으로, 원성의 성가퀴와 나란하고 반은 성 밖으로 나오고 반은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깥 쪽의 아래 너비는

26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1척이다.
현안(懸眼)[각각 길이는 20척이고, 지름은 5촌이다]이 3개 있다.
좌우의 아래 너비는 각각 29척이고 위로는 줄어들어 너비가 24척이다. 凸 모양의 성가퀴로 둘렀는데, 바깥 3면은 11첩(堞)이 있는데 높이는 5척이고

두께는 2척 8촌으로 각각 총안[사방 6촌]을 뚫었다. 내면은 좌우 평평한 성가퀴에 각각 1첩씩인데 높이는 8척 이고 가운데 5척은 속이 비게 하여 돌계단을

설치하여 대 위와 통하게 하였다.

 

 

 

 서장대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위에 올라가서 굽어 보면 팔방으로 모두 통한다. 석성[석성산]의 봉화와 황교(皇橋)[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한 성의 완급과 사벽(四壁)의

허실은 마치 손바닥 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고 위에 층각(層閣)을 세웠다.
앞쪽 대석은 4층인데 전체 높이가 5척이다. 댓돌은 3개인데 층계는 4개이고 대의 너비는 98척이다.
대 아래의 동서로 42척의 거리를 두고 좌우에 크고 붉은 의간[杆][큰깃대] 한 쌍을 나누어 세웠다. 상대(上臺)의 너비 87척 높이 2척이고, 아래 층각의

규모는 9간인데 가운데 한간은 사방 13척 2촌이다.

밑에는 판자를 깔고, 연잎 평난간으로 둘렀으며, 뒤쪽에는 분합을 드리웠다. 문지방 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사면에 각각 긴 시렁을 내물렸는데 길이가 6척 5촌이고, 네 모퉁이에 각각 시렁 하나 씩을 붙였는데, 역시 사방 6척 5촌이다.
모두 네모난 벽돌을 깔고 바깥에는 둥근 기둥 12개를 세웠는데 높이가 각각 7척이고, 이것을 여덟 모의 돌기둥으로 받치었는데 높이는 각각 3척 5촌이다.

위 층은 한 간인데 사면에 교창(交窓)을 내고 판자를 깔아 바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아래 층의 반자(盤子)가 되었으니 곧 조정(藻井)의 제도라는

것이다. 그 서북쪽 모퉁이에 층사다리(層梯)를 세워서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옥상(屋上)의 한 가운데에 절병통(節甁筒) 셋을 세웠는데 높이가 6척이다. 대 위에서 위층 대마루 대들보까지 전체 길이가 21척이다.
단청에 오토(五土)를 사용하였고, 대들보 위는 회로 발랐다. 대 뒤에는 팔면으로 된 노대를 쌓고 그 뒤에 후당(後堂) 3간을 지었는데, 군무를 보는 곳으로

쓰려는 것이다.
서쪽 두 간은 온돌이고, 동쪽 한 간은 판자를 깔았다. 모두 창과 분합을 설치하고, 단청을 하였다. 앞 기둥에는 평난간을 설치하고, 뒷담 동쪽 끄트머리에는

판자문을 내었다.

 

 

 

 

 

 

서북각루는 화서문의 남쪽 146보쯤 되는 거리의 산 위의 휘어 굽은 곳에 있다.
5량(五樑) 4간으로 동서가 18척, 남북 22척, 동북 3간은 모두 판자를 깔고, 사면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였고 외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을 뚫어 놓았다. 내면에는 태극을 그리고, 그 서남 한 간은 비워서 층계를 설치하여

북쪽으로 누상에 이어지게 하였다.

동남 1간은 청판(廳板)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을 설치하여 수직하는 군사가 있게 하였다. 평지에서 누의 바닥까지 5척 7촌, 누의 높이 7척

5촌이고,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으며, 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화서문

화서문[편액은 좌의정 채제공이 썼다]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묘좌(卯坐) 유향(酉向)에 자리잡고 있다.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꺽어지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협도는 둘을 세웠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 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다시 장안문

 

 화홍문을 통과하는

 

 

 조선왕조 창업 초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뒤 궁궐과 각종 관아,성곽을 조성 한 공사 이후, 화성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은 조선시대 최대의 국가적

 대역사(大役事)였다.  따라서 화성을 축성할 때 각종 물자가 엄청나게 많이 쓰여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우선 성을 쌓을 때 돌과, 벽돌, 목재, 각종 철물은 물론, 일꾼들을 먹일 식량과 땔감, 자재를 나를 수레와 우마(牛馬), 공사를 기록할 지필묵으로부터

단청, 가마니, 땔감, 숯, 노끈, 공구, 석회, 기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한 물자들이 필요했다.

다행히 화성 축성의 종합 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는 위와 같은 물자들 외에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화성축성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물자와 인건비 등을 합쳐 모두 87만3천517냥7전9푼이 소요됐다.

 

`화성성역의궤' 제5~6권은 재용(財用)편으로서 여기에는 화성 성역에 사용 된 각종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 부대시설별로 소요된 물품의 내용과

단가가 기록돼 있다. 참고로 이때 성인 잡부 하루치 품삯은 대략 2전5푼이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성 예정지에 있던 집들을 사들이면서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북리 지역에 살던 송복동이라는 사람의 5칸짜리 초가집을 수용

하면서 15냥 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추가 지급액 10냥:추가 지급액은 보상비일 듯) 그렇다면 당시 5칸 짜리 초가집을 매입하려면, 집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2개월 정도 잡역을 하면 됐다는 계산이 나오므로 당시의 화폐가 치를 알 수 있다.
또 쌀 1섬(당시 1섬은 15말)은 5냥 정도였으며, 소는 1마리에 20.35냥, 무 명 1필이 2냥, 숯 1석이 6전3푼, 쇠고기 1근이 5전, 돼지 1마리가 5.34냥이 었다.
이는 화성을 쌓는데 투입된 경비는 물론 18세기말의 물품 상황과 물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럼 먼저 화성의 축조에 가장 많이 쓰인 석재는 어떻게 확보되었으며 어 떻게 운반되었는지 알아보자.  지난 11월24일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 의 종합적 검토'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는 화성 축성에 사용된 석 재가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 었다고 밝혔다.
이 돌들은 무게 때문에 멀리서 운반하지 못하고 인근의 △숙지산 △여기 산 △팔달산 △권동(서둔동 권동 방죽{*`한국지명총람'에는 서호의 옛 제방

이라고 기록. 그러나 `화성지'에는 `권동제언은 화성부 남쪽 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지명총람의 기록이 맞는다면

권동은 돌산이 있던 화서동 동말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 있던 곳, 현재 는 건등이라고 불림)에서 채취해 사용했다.

 

숙지산(熟知山:옛지명은 孰知山)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인 데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대왕은 1796년 1월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孰知)? 암묵(暗默)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라고 감탄하 게 된다.
공석면 숙지산은 지금의 영복여고 뒷산이니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 다. 지금도 숙지산과 팔달산 곳곳에는 돌을 뜬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들의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는데, 각 부석소에서 캐낸 양은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

덩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해도 과 히 틀린 말은 아니다.
부석소에서 떠낸 돌은 치석소로 보내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었는데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ㆍ중ㆍ소로

규격화 하였다. 이렇게 다듬은 돌은 축성현장으로 옮겨졌다. 돌을 옮기기 위해 우선 정조 대왕의 지시대로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한'

도로를 개설했다.
돌은 소가 모는 대거(大車:소 40마리가 끄는 수레), 평거(平車:소 4~8마리 가 끄는 수레), 발거(發車:소 1마리가 끄는 수레)와, 사람이 끄는 동거

(童車:장정 4인이 끄는 수레) 등 수레를 이용해 날랐으며 썰매(雪馬)를 사용하 기도 했다.
이때 유형거(遊衡車)라는 수레를 시범 제작해 사용한 바 있는데 이는 대거 와 썰매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수레를 끄는 소들은 몸집이 크고 다리 힘이 좋으며 체력이 건장해야 했는 데 이를 위해 패장(牌將)을 파견해 각 읍의 장교와 함께 사들이게 했다.

화성 성역에 필요한 수레소는 경기지방에서 309마리, 호서지방에서 50마 리, 관동지방에서 80마리, 해서지방에서 167마리로 모두 608마리였으며 그밖 에 소 80마리, 말 252마리가 소요됐다.

목재는 장안ㆍ팔달ㆍ화서ㆍ창룡문 등 사대문과 동ㆍ서장대, 각종 포루와 각루, 포사 등을 건축하는데 이용됐다.  

목재는 종류에 따라 모두 2 만6천206주가 소요됐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4천902냥5전5푼이었는데 석재 가 13만6천960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기둥과 서까래에 사용할 목재의 확보는 화성 축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목재는 충청도의 안면도, 황해도의 장산곶,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와 강 원도의 한강 인근 지방, 전라도 좌수영의 순천ㆍ광양ㆍ흥양ㆍ구례ㆍ방답진ㆍ사도 진, 전라우수영의 자주ㆍ진도ㆍ장흥ㆍ강진ㆍ무안ㆍ흥덕ㆍ김제ㆍ완도, 경기도의 광주 와 남양, 광평 등에서 베어 들였다.
이때 나무를 벤 산은 국가의 큰 공사에 사용할 나무를 보호하던 금양처(禁養處), 또는 봉산(封山)이라고 했다. 임금님의 허락 없이 봉산이나 금양처 의 나무를 벤 자는 국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이들 목재의 운송은 배나 뗏목을 이용해 이루어졌는데, 충청도나 황해도, 호남의 목재는 각 수영에 딸린 병선(兵船)이나 개인의 어선을 이용했고, 경 기도나 강원도의 한강 주변에서 베어낸 목재는 뗏목을 엮어 운반하다가 바다 에서 배로 옮겨 실어 운반했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바닷길을 이용해 운반된 목재는 구포(현재 화성시 시화호 연해에 있는 구 포리)에 치목소(治木所)를 설치해 다듬은 다음 수원의 화성 공사 현장으로 옮겨졌다.
구포의 치목소에는 감독과 목수를 파견해 나무를 용도에 맞게 다듬은 다 음 수레를 이용해 수원까지 날랐는데 이를 위해 도로를 고치는 등 목재 운송 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나무를 베거나 운반하고 다듬던 사람들에게도 노임이 지급됐는데, 특 히 나무를 베는 사람이나 이를 운반하는 사람에게는 나무 한 그루당 1전, 또 는 5전씩이 주어졌다.
화성을 축성할 때는 석재와 목재말고도 많은 양의 철재(鐵材)가 필요했다.

이 공사에 소요된 철재는 모두 55만9천31근9냥3전과 철엽(鐵葉:대문에 붙 이는 쇠 장식으로서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만들었다)2천860조각, 기타 연장 류 등이 소용되었는데 이를 금액으로 계산하면 모두 8만6천215냥7전1푼이었 다.
이 철물들도 목재와 마찬가지로 각 도별로 나누어 구입토록 했으며 일부 는 일반 상인들로부터 구입, 배를 통해 운송했다.
한편 벽돌 및 기와도 많이 소용됐다. 벽돌은 전국에서 벽돌장들을 수원으로 소집해 임금을 지불하면서 구웠으 며 의왕시 백운산 아래 왕륜(旺倫)의 가마〔와벽소:瓦쮱所〕에서 굽다가, 후 에 화성 북쪽 성(北城)밖, 화성시 정남면 서봉산의 서봉동(棲鳳洞) 등에 가 마를 새로 설치, 모두 3곳에서 제작했다.

축성에 사용된 벽돌을 제작하는데는 2만6천577냥1전5푼의 비용이 들었다.
기와 역시 왕륜과 서봉, 사관평(肆觀坪:사근평)의 가마〔번와소:燔瓦所〕 에서 제작했으며 제작비용은 6천198냥3전6푼이었다.
벽돌과 가마 굽는 데 사용한 땔나무는 인근 개인 소유 산에서 돈을 주고 구입했다.  기타 물자로는 숯과 석회, 단청, 지필묵, 기타 잡물 등이 있었다.
숯은 모두 6만9천56가마로 지평, 광주, 용인에서 사들였다.  석회는 경기도 파주와 풍덕, 수원의 어랑천, 충청도의 평신진에서 구웠으 며, 황해도 금천에서도 많은 양의 석회가 배를 통해 수원으로 수송됐다.
종이는 대부분 서울의 종이전에서 사들였으나 정조 19년(1795) 광교동 입 구(연무동)에 지소(紙所)를 설치하고 종이제조 기술이 있는 승려를 모아 제 작했다. 연무동 수원여객 버스 종점 부근을 지금도 `지소', `지쇄'라고 하 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밖의 잡물(雜物)은 지난 호에서 밝힌 것처럼 그 종류와 수량이 너무 다 양하고 많아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소가죽 1천870장, 가마니 5만9천600닢, 새끼 39만1 천986발, 동아줄용 삶은 마 6천75근, 돌 운반용 생칡 2천852동이49근, 땔나 무 10만8천432단, 볏짚 24만2천284단, 숫돌 74덩이, 크고 작은 솥 86개, 큰 독 71개 등 140여 종류로 잡물 총 구입비는 12만3천744냥 1전 4푼이었다.
물론 이 세세한 기록들은 모두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우리 조상들의 철저한 기록 정신에 고개가 숙여진다.

 

화성일대를 돌아보고 집으로 가기전 어제 남한산성에서 찍어봤던 보름달이 맘먹은대로 찍혀지지 않아 다시 찍어봤다.

어제는 화이트 밸러스를 너무 밝게한것 같다.  

 

 

10. 7일부터 12일까지 열리는 화성문화제중에서 가장 볼만하게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라는 종목이다. 

올해는 10. 10일 토요일에 열리는데 이순신장군의 축제인 해남-진도 명량대첩축제에 가야하기에

관람할수 없을것 같다. 작녀의 능행차연시를 링크시켜본다.

 

화성문화제 -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 1 (08. 10. 11)  http://blog.daum.net/j68021/13649443

화성문화제 -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 2 (08. 10. 11)  http://blog.daum.net/j68021/13649496

화성문화제 -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 3 (08. 10. 11)   http://blog.daum.net/j68021/13649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