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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추억으로 떠나는 여행, 함라 돌담길 (09. 11. 07)

by 柔淡 2009. 11. 11.

익산의 특산물인 서동마를 주재료로 삼아 유명해진 본향퓨전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찾아간곳은 함라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3부자집으로 유명한 함라마을이다.

이 마을은 함라산을 주산으로 하고 부를 가져온다는 와우산이 마을전체를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부자가 많은

마을이었는데 그때의 영화는 간곳이 없지만 그 흔적인 돌담과 가옥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
근대 최고의 명창으로 불리는 임방울의 호남가(湖南歌) 중 한 구절이다. 우리가 흔히 함열하면 지금의 함열읍을

생각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임방울이 지칭하는 함열은 지금은 삼부잣집 돌담길로 유명한 함라(咸羅)의

함열리를 말한다.
함라의 함열은 역사적으로도 깊이가 있는 고장이다. 1409년(조선 태종9년) 용안현과 합하여 안열현(安悅縣)이라

하였다가 7년 뒤 다시 함열현으로 복구되어, 이후 조선 5백년 동안 현청(縣廳)소재지로서 관아가 이곳에 있었으며,

1895년(고종32년) 함열군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익산군 함라면으로, 1995년 도농통합으로 익산시

함라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관아지에는 동헌(東軒), 내아(內衙), 책실(冊室), 향청(鄕廳), 장청(將廳), 객사(客舍), 질청(作廳), 형리청(刑吏廳),

사령방(使令房), 통인청(通引廳), 현사(縣舍), 향교(鄕校)등이 있었으며, 현감아래 6방(吏戶禮兵刑工房)이 지방행정을

수행하였고, 함라노소의 함열현 선생안, 호남읍지, 함열현지에는 1453년(단종 1년)이후 현감의 명단이 기록 보관되어

오고 있다.
이렇듯 깊이가 있는 고장 함라의 함열리는 부자도 많았다. 문화재로 지정된 조해영, 김안균, 이배원 가옥이 그 증거다.

한 마을에 서로 붙어있는 이들은 모두 만석꾼 집안으로 집 규모 또한 90칸이 넘었다고 하니 마을의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가는 대목이다.

 

함라마을의 돌담길 

 마을입구에 제일먼저 눈에띄는 조해영 가옥

 

□임천(林川) 趙씨, 정읍군수 지낸 조한기 3만석 거부, 조해영은 1만석 상속
조해영 가의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을 이른다. 조해영의 13대조가 함열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 씨 집안이 부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조 씨 집안이 부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이다. 조해영의 고조부부터 시작한 부(富)는 증조부 조한기(1903년 사망)에

이르러 3만석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조한기는 사천군수에 이어 정읍군수를 지내며 선행을 많이 베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읍군수 재직시 군청 건물이 없자 사재를 출연하여 건물을 짓고, 흉년으로 백성이 굶자 사재 500석을 나눠주기도 해,

조정에서는 정읍군수의 품계를 올려주고, 정읍군민들은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때부터 조 씨 집은 ‘정읍집’이라 불리게 된다. 택호(宅號)가 정해진 것이다. 조한기의 아들이자 조해영의 증조부인 조준식

(1926년 사망)은 구한말 중추원의관 벼슬을 했다.
큰아들 조해영은 아버지 조용규(1882~1953)로부터 1만석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조용규가 자식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자상속에 많은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조해영의 아버지 조용규는 서울에 집을 사 자식들을 교육을 하였다. 서울에

자식교육을 위한 가옥역시 대단했다. 12대문 집인 이 집은 탁지부대신을 지낸 이용익 대감의 소유로 종로구 당주동에

위치했다고 한다.

□조해영 家 고조부부터 단계적 건축, 이배원가옥 모델은 거짓
이른바 조해영 家(전라북도문화재자료121호)로 불리고 있는 지금의 함열리 집에 대한 건축이야기도 흥미롭다. 일부에서

조해영 가옥이 일제강점기 때 농장을 경영해 부를 축적하고, 이배원 가옥을 모델로 지어진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조해영의 동생 조교영은 밝히고 있다.
조해영 家는 조해영의 고조부부터 단계적으로 지어졌으나 실제 조해영이 지은 것은 없다. 동쪽채는 고조부가, 큰방채는

증조부가 지은 것이다. 안채와 양옥채는 할아버지가, 새방채와 신당, 농장채는 아버지가 지었다고 조교영은 증언한다.

특히 조해영의 할아버지는 안채와 양옥채를 지을 당시 궁궐을 짓던 당대 최고 목수를 불러들여 3년에 걸쳐 건물을 완성

했다고 한다.
이름도 생소한 양옥채는 무엇일까.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듯 한식, 일식, 양식이 혼합된 건축양식이었는데 아쉽지만 지금은

헐리고 없다. 이 건물은 앞면에 양옥형식을 도입하여 카페트를 깔았으며, 왼편은 다다미를 설치하고, 오른편은 한식으로

꾸몄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내의 가구와 목욕통 등 소품은 탁지부대신 이용익의 집에서 가져온 서양식, 일본식 물건들로

채워졌다고 하니 궁금하기 그지없다.
가마곳간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가마곳간이란 요즘으로 치면 주차장을 말한다. 두 명이 메는 2인교부터 4인교, 8인교가

이곳에 보관되었다고 하나 이 역시 헐리고 없다. 매사냥을 위한 사람도 고용했다고 한다. 순창사람인 박종근을 입주시켜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 조해영의 아버지는 매를 동원해 사냥에 나서고, 조해영은 5연발 총을 가지고 사냥에 나섰다고 하니

조 씨 家의 영화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석꾼답게 농장창고도 대단했다고 한다. 창고의 규모가 무려 100평에

달했으나 지금은 이도 헐린 상태.

□농지개혁, 한국전쟁으로 쇠락의 길

지금 12채의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본채, 새방채, 농장채, 소슬대문, 행랑채이고 나머지 7채의 건물은 헐려 아쉬움이 있다.

영화를 누리던 조 씨 家가 이렇듯 쇠락에 이른 것은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 그 원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쟁이후 가세가 급전직하하여 생계가 더욱 더 곤궁해지자 영화를 자랑하던 12채의 집마저 뜯어 팔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조교영은 밝혀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지금은 후손들이 모두 떠나고 남아있는 건물은 조해영의 막내아들 조인호(덕성여대교수) 씨 명의로 등기가 되어있다. 정부는

전국 10개의 돌담길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 가운데 한 곳이 조 씨 家를 비롯한 함열리 삼부잣집 길이다.

 만석꾼의 영화를 자랑하던 집들은 일부는 헐리고 폐허가 되어있는데 새빨간 피라칸사 열매만 그때의 영화를

추억하는듯 애처롭게 피어있다.

 김육불망비

이 비석의 건립년대는 조선 효종10년 1659년으로 영의정 김육(1580~1658)이 사망한 이듬해로서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한 김육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이다.

비는 기단, 비신, 이수로 구성되었으며 기단은 화강암,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비의 전면에는 중앙에

「영의정금공육경요보민인덕부망비」라 새겨져 있으며, 그 좌측 하단부에 「산부대(山不大) 상공(相公) 해부심(海不深) 고금(古今)」

이라는 명문과 후면에 「기해(己亥) 이월(二月)」이 음각 되어 있다. 이수에는 양각으로 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전면 중앙에는

두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주변을 이무기의 몸체가 감싸고 있다.
이수의 후면 중앙에는 국화무늬가 있고 주변에는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지어져서인지 한옥에 일본식 현관이 들어서 있다.

 

 

 

 

 김안균 가옥. 이집은 들어가 볼수 없다.

이 집의 건축년대는 오래되지 않으나 규모를 보면 대지가 2,318평에 건평만 188평이 되어 전북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가옥(家屋)이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나 꾸밈 일부에 일본 건축 수법이
섞여 있는데 조선 후기 양반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집으로 당시 주택구조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이 가옥이

1920년대에 지어진 만큼 우리나라의 전통적(傳統的)인 상류가옥이 이무렵에 어떻게 변천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면에서도 강릉의

선교장(船橋狀)과 더불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배원 가옥. 여기도 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이 집은 현 관리자의 조부인 이배원이 1917년에 지은 것으로 그는 함라면의 대표적인 부농 중 하나였다. 이씨집 외에도 당시 함라에는

소위 만석군으로 일컬어지는 두명의 부호 즉 김씨집(김안균가(家))과 조씨집(조해영가(家))이다. 이 집은 세 집중에서 가장 먼저 지은 집

(1918년, 大正7)으로 김안균가(家)와 조해영가(家)의 모델로 작용하였으며 평면의 구성에서도 서로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건립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위의 토석 담장만이 남아있다.

사랑채는 내부가 개조되어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안채는 입식부엌으로 개조하여 활용하는 안방 뒤쪽 공간을 제외하고 비교적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 목조 와가로 장대석 두벌대 기단 위에 주좌를 높게 치석한 방형 초석을 놓고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했다. 기둥은 모서리를

둥글게 쇠시리 하여 모접기 하였다. 평면은 좌측부터 건넌방, 대청, 웃방으로 이어지며 웃방에서 전면으로 두 칸의 안방과 부엌이 돌출 된

ㄱ자집이다. 이 집은 평면상으로 전후 퇴집 구조이나 가구구조는 1고주 5량가로 배면 평주에서 고주 중간에 대들보를 끼우고 고주 머리가

직접 종보와 중도리를 받게 했다.

 

 

 

 

 3부자집이 있는 함라마을 을 지나 함라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옛노래에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라" 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이곳 3부자집을 보니 옛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