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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징검다리 1박2일 고향방문 이벤트] 7 - 추억의 목계나루 (09. 12. 20)

by 柔淡 2009. 12. 24.

박달재에서 30여분을 달리면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목계나루가 나온다.

 

목계나루 소개글

남한강은 상류의 가흥창, 목계, 충주, 청풍, 매포, 영월 등에서 거둔 세곡(稅穀)이 한성으로 올라가는 수운이 이루어지던 강이다.

경제 규모가 보잘 것 없던 시절에는 물물교환 형식의 상거래에 그쳤지만 조선 후기에 인구가 늘고 상거래가 늘어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상설시장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따라 목계나루는 남한강안의 내항으로 크게 발달하였다. 목계 위쪽의 남한강 상류는 봄가을의 갈수기에 수심이

얕아 수백 섬을 싣는 큰 배(장삿배)가 운행할 수 없었던 반면, 목계나루에는 수십 척이 선착할 수 있는 넓고 깊은 강과 백사장이

있었던 것이다.

목계나루는 영월과 제천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고 충북, 강원, 경북 등 중부 내륙지방 육로 중심지였다. 또 서울과 가까워 한성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지역이라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목계의 옛 이름이 ‘전국에서 다섯째 안에 드는 포구’라는 뜻의

오목계(五牧溪)였던 이유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목계는 과거에 세미(稅米)를 운반하던 가흥창(충북 중원군 가금면 가흥리 남한강변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창고)을 끼고 내륙항으로 발전했다.

당시에는 충청도는 물론 경상도 북부 지방의 세곡까지 받았으므로 가흥과 목계 두 마을에는 큰 상가를 형성하여 충주에 버금가는 성시(盛市)를

이루었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40여년전까지는 목계대교가 없었고 매년 다릿발이 하나둘씩 세워졌지만 장마가 한번지면 다 떠내려가서

새로 다릿발을 놓곤했다. 그 당시 어른들의 말씀은 국회의원 선거를 서너번해야 다리가 제대로 놓여질 것이라 했는데 말씀대로

20여년 지난뒤 다리가 놓여졌다.

그렇게 놓여진 목계대교도 지금은 새로운 도로에 밀려 간간이 오가는 차만 보일 뿐이었다.

그 당시 내가 앙성에서 충주를 가끔가다 오갈때는 버스를 타고 목계까지 와서 버스를 배에 싣고 강을건너 다시 길에내려 버스가

충주까지 가곤했다. 도로는 당연히 먼지가풀풀 날리는 신작로. 장마가 지면 버스를 배에 실을수 없어 한쪾까지 버스를 타고와서

사람만 강을 건너고 반대편에서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가곤 했다.

 

 

 목계대교

 

 오리떼만 한가하게 남한강을 오간다. 상류에서는 4대가 공사준비가 한창이더라.

 

 보가 생기면 이런 아름다운 풍경들이 남아 있을것인지?

 주인잃은 나룻배마 쓸쓸하다.

 

 

 

 

 

 

 

 

 

 

충주출신 신경림 시인의 유명한시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