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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징검다리 1박2일 고향방문 이벤트] 6 - 울고넘는 박달재 (09. 12. 20)

by 柔淡 2009. 12. 24.

의림지를 한바퀴 둘러보고 다음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충주 앙성으로 가야하는데 제천에서 앙성까지는 4차선도로가

넓게 뚫려있어 한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내가 앙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천중학교에 입학해서 집이 제천으로

이사하기전 1년동안 가끔가다 주말에나 방학때 제천에서 앙성까지 갈려면 박달재를 넘어 산척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목계 나루터에서 버스가 남한강을 배로 건너다보니 네시간정도 걸렸던 기억이 있다.

그당시 박달재는 포장도 되어있지 않아 버스는 대관령에 버금가는 아흔아홉 구비를 터덜거리며 돌고돌아 느릿하게

기어 다녔었다. 지금은 박달재 바로밑에 터널이 뚫리고 4차선도로가 쭉 뻗어 있어서 차들이 날라 다니는데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차창을 스쳐가는 풍경은 예전에 비해 훨씬 못하다.

우리 현대인은 시간을 조금 얻는대신 더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허둥거리며 살아가는게 아닐까? 자문해 본다.

 

나도 박달재를 넘어 다닐때는 시간에 쫏겨 터널로된 4차선 도로만 이용했었는데 이번 여행은 고향의 옛추억을

되새겨 보러 일부러 떠난 여행이니 제천에서 충주로 가는길 박달재 터널 못미쳐 구도로로 올라선다.

새로난 길에 비해 아주 좁은 2차선 도로지만 그전에는 이길로 시멘트를 실은 대형차량들이 아주 많이 다녔었다.

지금은 내가 운전하는차와 일부러 박달재에 들리려는 극소수의 관광객외에는 이용하지 않는 도로이다.

 

박달재 소개(제천관광 홈페이지 인용)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산을 박달재라 한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 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 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 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 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 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박달과 금봉의 애처러운 사랑을 형상화한 동상

 

 

 

 그밖에도 다양한 조각들이 있다.

 

 

 

 

  

 

 

 

 

 

 

 고려의 명장 김취려 장군동상

거란족 떨게 만든 고려의 명장 최고 관직인 시중까지 올라 (울산종합일보 인용)

고조선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견뎌냈다. 특히 고려시대는 거란, 여진, 몽고, 왜군 등 다른 시대보다

더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때로는 시원하게 적을 물리치기도 하고, 때로는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유명한 영웅 중 우리가 아는 인물은 강감찬, 윤관, 서희 장군 정도. 하지만 울산의 인물이면서 거란, 몽고 북방의 이민족들을

떨게 한 김취려 장군은 잘 모를 것이다.
김취려(金就礪) 장군(?~1234)은 언양 김씨의 시조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사이에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김선(金繕)의 7세손이다.

어려운 국제정세서 뛰어난 활약
김취려 장군이 활약하던 13세기 초엽의 국제 정세는 금(요)나라를 압박하던 몽고족이 북쪽에서 새로이 흥기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몽고족이 그 세력을 동서남북으로 뻗쳐 금나라의 황하이북 땅을 차지하자 금에 속했던 거란 유족들은 느슨해진 금의 간섭

에서 벗어나 대요국(大遼國)을 세워 고려를 침입해 왔다.
이러한 시기 뛰어난 전술로 거란을 크게 물리친 영웅이 바로 김취려 장군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 3년(1216)에 거란왕자 금산(金山), 금시(金始)가 대요목국왕(大遼牧國王)이라 칭하고 몽고에게 쫓겨 국경을 넘어

오자 김취려 장군은 후군병마사로 상장군 노원순, 오응부 등과 함께 1만3천의 군사로 15만 거란병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뒀다.
또 고종 4년에는 거란병이 개성을 위협하고 철원, 원주 등을 짓밟았는데 그는 서울을 지켜 적의 침공을 물리쳤다.

박달재 전투, 역사의 한 페이지 장식
김취려 장군이 활약한 가장 유명한 전투는 제천(堤川) 박달재 전투로 거란족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고 물러났다.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노래로 유명한 박달재 고개에 가면 김취려 장군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와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이후에도 그는 몽고군과 연합해 거란족 잔당을 소탕하고 국내의 반란까지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병부판사가 됐고, 고종 15년에는

고려시대 최고 관직인 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평생을 전장에서 활약하다 고종 21년(1234)에 사망하니 고종은 3일간 정사를 중단하고 친히 빈소에 나와 조의를 표했고, 위열공(威烈公)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김취려의 풍모는 신장이 6척5촌(185cm)이고 수염이 배 아래까지 내려와 조복을 입을 때는 수염을 시종들에게 나누어 들게 하고 했다고

전하며, 거란족은 관우 장군을 닮은 김취려장군의 외모만 봐도 벌벌 떨었다고 한다. 또 그의 사람됨이 절검 정직해 충의로 자신을 돌보고

군기를 엄하게 하니 사졸들이 함부로 그를 대하지 못했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돼 먹을 것이 생겨도 사졸들과 나눠먹고, 적을 공격할 때는 그의 전략전술이 뛰어나 큰 공을 세워도

그 공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 사졸들은 그의 높은 덕망을 칭송했다.

도굴꾼에 의해 현재의 묘 발견
김취려의 후예 중 많은 인물이 나서 활약하였는데 아들 전(佺)은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고, 손자인 양감(良鑑)은 첨의중호(僉議中護)로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지기도 하는 등 후대에까지 그의 가문은 명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 그의 묘는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화장산

자락에 있으며, 장군의 사적비는 1983년 5월에 세운 것으로, 비문에는 장군의 일대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이 묘는 1909년 도굴꾼이 도굴

하다 우연히 흘린 지석(誌石)이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은 언양 김씨 후손들이 묘를 관리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장군의 공적에 비해 개인이 세운 기념관이라 조잡하고 초라하다.

 

 박달재는 두개의 구역으로 나눌수 있는데 제천쪽 방향에는

 애국지사 형제의 흉상과추모비가 있고

 

 어울리지 않는 남근조각과

 이상한 조각들이 있다.

 

 

 뭔가 정비를 해야 할것 같다.

 박달재에서 내려와 충주로 가는 구도로에서 보이는 사찰. 이름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