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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전북익산]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서품후 첫발을 내디딘곳, 나바위성지

by 柔淡 2010. 4. 19.

나바위성당 뒤로가면 나바위 성지가 있다. 이곳은 1845년 김대건 신부님이 마카오에서 한국인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은후 당시 조선땅에

천주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처음으로 입국한 장소이다.

 

나바위성지 홈페이지 발췌

나바위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10월 12일 밤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고주교님과

다블뤼(Daveluy)안신부님 그리고 11명의 조선교우들과 첫발을 내디디신곳이다. 김대건신부는 1821년 8월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이냐시오와 모친 고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김진후비오와 조부 김택현 안드레아 등이 순교한 순교자가문이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가 7살이었다. 김대건의 부친은 1839년 기해박해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순교성인이시다. 김대건이 첫영성체를 한 것은 1836년 1월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나신부님에

의해서였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하게

된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소망은 겨레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너무나도 거룩하고 원대한 것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은 7월에 서울로 올라와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바오로 현석문가롤로 조신철가롤로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의 교우들과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소년은 1837년 6월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함께 갔던 최방제가 1년만에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이역만리 타향

에서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조국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님이 순교하게 된다.

모방(Maubant) 나신부님과 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님 그리고 정하상 , 유진길, 조신철 한국교회의 지도급 교우들이 순교하는 대박해였다.
조선은 또다시 목자없는 교회가 되어 교우들은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김대건은 1844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선임된

고주교님에게 12월15일에 부제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선영입을 위해 1845년 1월 김대건은 의주쪽으로 어렵게 혼자 입국하는데 성공한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주교님을 맞아 들여야 하는 중대한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외국인 성직자들이 육로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작은배 한

척을 사서 현석문 가롤로등 11명의 교우들과 상해로 돌아갔다.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20리쯤 떨어진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으로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국교회창립 61년만의 일이었다. 8월31일에 김대건신부는 다블뤼신부와 11명의 교우들과 페레올주교님이 라파엘호라고 이름을 붙인 작은 어선을

타고 조선을 향해 출발한다.
라파엘호가 처음에는 요동방면으로 가는 중국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풍파를 만나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물결이

치는대로 배를 맡기게 되었다. 9월 28일 라파엘호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된다.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에서 조금 떨어진 나바위에 상륙하게 된다. 9년만에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과 꿈에도 그리워하며 6년을 포교지를 향해

준비한 페레올 주교님은 감사의 기도로 나바위에 첫발을 내디디었다.

1845년 10월12일 밤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후 어두운밤 나바위에 첫발을 디딘 것은 상해를 떠난 지 바닷길 42일만의 일이었다.

세분 성직자들의 거룩한 첫마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나바위성지이다. 

 

나바위라 넓은바위를 일컷는 말이라고 하는데 성당 뒷동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졋다.

 

성지입구  

 십자가의길 14처를 전부다 바위에 조각해서 설치했다.

 

 

 

 

 

 

 

 

 

 

 

 

 

 2대 주임신부 소세의 묘

 

 이름처럼  동산이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졌다.

 

 망금정

나바위성지는 화산이라는 산에 있다. 산이 아름답다고 해서 우암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다. 화산의 끝자락에 넓은 바위가 있어 나바위라 불린다.

금강의 강변에 자리한 화산은 산밑 서북쪽으로 물이 닿았고 갈대숲이 우거졌다.
이곳에 한국인 첫사제 김대건이 첫발을 내디딘 것을 기념하여 나바위성당이 설립된후 초대 대구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가 해마다 5 ,6 월이면

연례피정을 화산 정상에 있는 나바위에서 가졌다.
개인피정 장소로 더할수 없이 아름답고 조용한 분위기를 감탄하며 피정을 하시는 주교님을 위해 베로모렐신부는 1915년 정자를 지어드렸다.

이 정자를 드망즈주교는 망금정이라 이름붙였다. ( 望錦 바랄망 , 아름다울금 )
금강을 바라보며 세분 성직자의 아름다운 영혼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장소이다.

 

 망금정에서 바라본 금강. 멀리 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인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도착했을 당시에는 가운데 보이는 둑과 비닐하우스가 없었고 망금전 바로 아래까지 금강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화산정상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순교비는 김대건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세운 것이다. 목선의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된다. 1845년 10월12일 나바위에 입국한 김대건신부는

다음해인 1846년 5월14일 서해 해로를 통해 최양업과 이메스트로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연평도 조기잡이배에 접근해서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김대건신부는 옹진, 해주감옥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정은 강경한 쇄국정치를 주장하며 김대건신부를 통외 (通外)의 위험분자로 몰아서 마침내 군문효수형을 내렸다. 1846년 9월16일 한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서울성밖 새남터에서 김대건신부는 25세의 젊은나이로 참수치명했다. 김대건신부는 처형을 받기에 앞서 “ 여러분 나의 말을 들으시오 ! 내가 외국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내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라고 믿음과 신념에 찬 말을 외치고 외연하게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런 선구자적인 분들이 있엇기에 한국천주교회가 지금처럼 발전하고 있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