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부여] 백제시대 유물의 총본산, 국립부여박물관 - 야외전시 유물

by 柔淡 2010. 5. 13.

청소년수련원에서 간단한 안내말씀을 듣고 다음으로 찾은곳은 국립부여박물관이다.

계룡대에 살때 한두번 와본 기억이 있는데 유물들은 생소한 느낌이다.

그때는 먹고살기 바뻐서 지금처럼 우리역사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사진도 찍지 않을 때라서 그랬던것 같다.

 

박물관 소개 (http://buyeo.museum.go.kr/home.do?method=main)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로 백제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6,586평의 대지 위에
건물 총면적은 590평, 전시실 면적은 230평 규모이다. 1929년에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로 창립하여, 옛 객사 건물을 백제관이라
이름짓고 진열관을 개관하여 수집한 유물들을 전시했다. 1939년 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으로, 1945년 10월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으로
개편했다가, 1975년 8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승격했다. 현재의 박물관은 1971년 9월 1일에 신축하여 개관한 건물이다.
전시실은 제1실이 선사시대와 백제시대실, 제2실이 불상 및 공예품실, 제3실이 석불·석등 등을 진열한 석조물실이다. 정원에는
석조·석비·탑재·주춧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장유물은 주로 각종 백제 유적지에서 출토된 백제 계통의 금속제품 1,100여 점,
옥석제품 600여 점, 토도(土陶)제품 4,400여 점 등의 총 6,000여 점에 이른다.
〈부여박물관도록〉·〈백제토기특별전도록〉 등의 출판물을 간행했다.

 박물관 전경

 

당유인원기공비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은 유인원의 가문과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 의해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660년에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도 평정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비문이 지워져 더 이상 알 수 없다.『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하고 있으나,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고려시대에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을 새긴 비이다.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박물관으로 옮겼으며

비몸돌만 남아 있다. 비문의 앞면은 건립 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새겼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에 입적하였다. 죽으면서 문도(門徒)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며, 고려 후기의 간략화 된 석비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동사리석탑

원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석탑이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네면에는 각면마다 3개의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위층 기단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네 모퉁이마다 돌출된 꽃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는데, 2층 몸돌부터는 심하게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 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지금의 장식은 훗날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석탑양식이다.

 

 박물관석조여래입상

1933년에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전천왕사지(傳天王寺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몸체에 비하여 머리가 크며 어깨와 하체가 거의 일직선으로

곧바로 서 있는 자세이다. 얼굴은 살이 올라 풍만하며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아무런 무늬없이 발 밑까지 내려져 있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이 불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 있어 균형미가 부자연스럽다. 충청도 일원에서 유행했던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성주사지 출토 비머리

이수(?首)는 이무기를 새긴 비석(碑石)의 머릿돌을 가리킨다. 이수는 일찍이 중국 한(漢)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당(唐)나라에

이르러 절정기를 이룬다. 이 성주사터 발견 비머리는 전체모양이 훈형(暈形)으로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석비(石碑)를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중앙 상단부에는 원형으로 된 제액(題額)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각이 섬세한 작품이다.

 성주사지출토 비석받침

비석받침[龜趺]은 거북모양의 돌비석 받침돌을 가리킨다. 거북의 잔등에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

일은 중국 당(唐)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그 뒤 전시대를 통하여 성행하였다.
이 비석받침은 머리와 몸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다리와 거북의 등모양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수법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상부에는 비신을 꽂을 수 있는 비좌가 마련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비석받침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부여석조

부여현의 동헌건물 앞에 있었던 것을 일제시대에 옛 박물관 뜰로 옮겼다가 현재의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부여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백제시대의 유물로, ‘工’자형의 받침대 위에 둥근 꽃망울 형태로

올려져 있다. 받침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결한 모양이다. 그 위에 놓인 석조는 입구가 약간 오므라들면서 밖으로 둥글게 원호를

그리며, 바닥은 평평한 듯 하나 완만한 곡선이다.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개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고,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국보 제9호)의 1층 탑몸돌에 새겨진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과 같은 글을 새기려던 흔적이 보인다.

이 석조에는 연꽃무늬 장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찰과 관계된 유물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가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쓰이던 석련지(石蓮池)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된 석조로,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이 잘 나타나 있다.

 한시간 이내에 내부유물까지 돌아봐야 하기에 너무 바쁘다.

나중에 개별적으로 와서 천천히 감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