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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부여] 1500년전 멸망하여 도굴되고 잊혀질뻔 했던 백제왕릉원

by 柔淡 2010. 5. 13.

박물관을 돌아보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백제왕릉원, 전에는 능산리 고분군이라고 했었는데...

 

고분군은 해발 121m의 능산리 산의 남사면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고분군이 위치한 자리는 이른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점지(占地)된

전형적인 묘지로서의 지형을 갖추었다. 뒷산을 주산으로 하고,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앞산인 염창리 산을 남쪽의 주작으로 삼았고,

묘지의 전방 약 200m 거리에 능산리 천이 서류하는 남향의 왕실의 공동묘지이다.

고분은 전열 3기 후열 3기, 그리고 맨 뒤 제일 높은 곳에서 1기가 더 발견되어, 지금은 모두 7기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

고분의 분구는 모두 원형봉토분이며, 크기는 대형,중형,소형의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대형인 전열의 3기는 분구의 직경이 약 25~30m이고,

중형인 후열의 분구는 직경이 약 20~25m이며, 최후의 1기는 분구의 직경이 20m 내외이다.
이들 고분은 일제에 의하여 6기가 발굴조사되었고, 뒤편의 1기는 1971년 보수공사시 발견되어 추가되었다. 1915년에 2호(중하총(中下塚)),

3호(서하총(西下塚)),5호(중상총(中上塚))가, 1917년에 1호(동하총(東下塚)),4호(서상총(西上塚)),6호(동상총(東上塚))가 각각 조사되어

내부구조를 알게 되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의 구조형식도 세 종류로 분류된다. 평천정식석실(平天井式)-벽상면에 판석만을 올려놓은 것),

평사천정식석실(平斜天井式)(벽상면에 장대석을 안으로 경사지게 세우고 그 위에 판석을 올려놓은것),터널형천정식설실(양쪽의 긴

벽상에 장대석을 안으로 경사지게 쌓아 곡면을 이루어 한 것) 등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일찍이 도굴되어 조사시에는 약간의 유물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2호분에서 칠기편 금동원두정(金銅圓頭釘), 5호분에서

두개골파편 도칠목관편(塗漆木棺片), 금동투조식금구(金銅透彫飾金具), 금동화형좌금구(金銅花形座金具) 등만이 발견되었고, 분구 외에서

토기기대, 호 등이 수습되었다.

능산리 고분군은 연대순으로 보면 중하총, 동하총, 서하총 순으로 축조되었다. 중하총을 제일 이른 시기로 보는 이유는 터널형식은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과 6호분의 형식과 같고, 단지 재료만 전에서 돌로 대치되었기 때문이다.

 

특정한 위치에서만 일곱개의 고분군이 전부다 보인다. 

 

1호분인 동하총은 장방형현실(玄室)과 연도(羨道)로 이루어진 단실묘(單室墓)이다. 현실과 길이 연도는 사면벽을 화강암과 편마암(片麻巖)의

거대한 1매 판석을 사용하였다. 석실 바닥의 중앙부에 모전석(模塼石)을 사용하여 길이 238cm,너비 125cm,높이 17.5cm 규모의 관대(棺臺)를

만들었는데, 상면을 들고 내부를 보면, 당초에는 1인용 관대였으나 뒤에 양측으로 확장하여 2인용 관대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석실과 연도 사이는 너비 104cm,길이 63.5cm의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석문[문비석(門扉石)]을 닫도록 하였다. 연도는 비교적 길고,

넓게 하였는데, 밖으로 갈수록 넓어져서 나팔형으로 되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내연도,외연도로 구분하였는데, 내연도는 석실과 같은 1매의

판석으로 하고, 외연도는 돌을 쌓은 후 표면에 두텁게 회발이를 하였다. 연도 입구는 잡석을 쌓아 폐쇄하였다. 현실의 네 벽과 천정에는 벽화를

그렸다. 1매로 된 거대한 판석의 표면을 물갈이[수마(水磨)]하여 반질반질하게 하고, 그 표면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에 주작, 천정에 연화문과 유운문(流雲紋) 등을 각각 그렸다. 이 사신도의 양식을 송산리 6호분으로 연결되며, 멀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추축된다. 석실전장은 759cm이고, 현실 길이 326cm, 너비 151cm, 벽고(천정고) 194cm이며, 연도 길이 370cm, 너비 143cm,

천정고 168cm의 규모이다.

 

 

 

 2호분인 중하총은 장방형의 석실과 비교적 긴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천정형식은 터널형이며, 벽체는 긴 장대석으로 축조하였다. 마치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형식을 재료만 벽돌에서 장대석으로 바꾸어 놓은 형식이다. 석실전장은 672cm이고, 현실 길이 349cm, 너비 215.1cm,

벽고 130.4cm, 천정고 234.3cm이며, 연도 길이 290cm, 너비 112.2㎝, 천정고 126.1cm이다.

3호분인 서하총은 장방형석실과 비교적 짧은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이다. 천정의 형식은 평사천정이며, 벽체는 거대한 판석 1매로 구성하였다.

이 형식은 7세기경 부여지방에서 크게 유행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석실전장은 471.6cm이고, 현실 길이 314cm, 너비 136cm, 벽고 131cm, 천정고

165cm이며, 연도 길이 131cm, 너비 122cm, 천정고 131cm이다.

4호분인 서상총, 5호분인 중상총, 6호분인 동상총 등은 판석조의 단실묘이며, 천정형식은 평사천정으로 이루어졌다.

7호분은 장방형석실과 짧은 연도로 된 단실묘이며, 벽체와 천정은 각면 4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다. 석실전장은 355cm이고, 현실 길이 139cm,

너비 62.5cm, 벽고 100cm, 천장고 145cm이며, 연도 길이 55cm, 너비 90cm, 천장고 100cm이다.

 좌측에서는 이자리에 서야만 일곱개의 고분이 다보이고 

 

 의자왕와 아들 융의 가묘 (의자왕이 묻혔다는 중국 북망산의 흙을 가져다 만들었다.) 

 

의자왕 관련자료

 

초기 생애

 

599년 백제의 왕족인 서동사택부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어 아버지가 왕에 오르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 불렸다. 641년 아버지 무왕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면서 당 태종에 의해 '주국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되어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그는 왕위 초기에는 아주 휼륭한 정치를 폈다. 642년에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연개소문과 연합하여, 의자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다. 이어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구 가야지역 최대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는 등 백제의

힘을 떨쳤다. 이때 김춘추는 대야성에서 사위와 딸을 잃었다.

김춘추가 고구려로 들어가 군사원조를 요청했을 때 고구려는 본래 자신들의 땅이었던 죽령 서북지방을 돌려주면 돕겠다고 하였다. 의자왕은

당태종에게 부여강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연합하지 않고 오히려 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원한다고 하였다. 643년에는 고구려와 화친하고 당항성

(黨項城)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으려 시도하였다.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 태종은 644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하였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고자 신라에서 원군을 징발하자 이 기회를 노려 649년 신라의 7성을 습격하다가 김유신(金庾信)에게 역습을

당하였다. 그 후 백제는 결국 이를 다시 빼앗다. 648년 겨울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태종의 신임을 얻고, 649년 당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중국과 외교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백제도 조공사신을 보내어 관계개선을 시도했으나 당이 신라의 실지를

반환하라고 하자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후 백제와 당의 외교관계는 멸망시까지 단절되었다.

의자왕은 655년에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성 30여 개를 빼앗았고, 659년 4월 신라를 다시 공격하였다.

백제의 멸망

즉위 후에 국위를 만회하려던 의자왕의 노력은 57세를 넘기자 차츰 약해졌으며, 방탕해진 의자왕은 왕비 군대부인(또는 은고)과 함께 사치스러운

주연을 매일 열었다. 그로 인해 총기가 흐려지고 방종해져 충신 성충의 말을 무시하고 하옥하자 국정이 문란해져 갔다. 그리고 그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말이 “육로는 탄현(炭峴)에서, 수로는 기벌포(伎伐浦)에서 막으소서.”라고 하였지만 그는 그 말을 무시하고 여흥에 빠졌다.

거듭된 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라를 압박하자 마침내 당과 신라는 밀계하여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협공을 하였다. 귀양 가있던 흥수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성충과 같은 말을 하자 믿지 못했다. 기벌포에서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은 대패하였고, 황산벌에는 계백(階伯)을 5천의 군사와

보내어 4번을 막아냈지만 백제군의 10배나 되는 신라군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계백과 그의 군사는 전멸하였다.

 

사비성 부근에서도 결전이 벌어졌으나 백제군 1만이 전사하며 대패하고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이 포위되자 태자 융과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으며, 사비에는 둘째 아들 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항전하다가 곧 항복했다. 그 후 의자왕도 항복했다.

중앙군의 전멸과 왕성이 무너지며 거의 모든 왕족과 의자왕의 측근 최고 지배층들이 모조리 포로가 되자 가망없다고 여기고 의자왕을 배신한

웅진성 방령 예식(禰植, 예식진(祢寔進))에 의해 항복이 진행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본기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자왕이 너무 쉽게 항복을 하였는데, 의자왕은 이것을 대당외교투쟁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지 국가의 멸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당은 이후 부여 융을 웅진도독으로 신라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아 동맹을 맺게 하는 의식을 웅진 취리산에서 행한 바 있다.

즉, 당나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2]

그 후 왕자들과 대신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 2천 명과 함께 당나라 수도로 압송된 후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망국의 군주가 묻힌다는

 낙양북망산에 묻혔다.[3][4]

3천 궁녀와 낙화암

자살한 궁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서 “궁녀들왕포암(王浦巖)에서 올라가 물로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타사암(墮死巖)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라는 내용이다. 그 뒤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권2에서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5]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 1448~?)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이다.[3]

“3천 궁녀”를 맨 처음 언급한 글은 윤승한(尹昇漢)이 지은 소설김유신》(野談社, 1941년)이고, 최초의 공식 기록은 이홍직(李弘稙)이 쓴 《국사대사전

(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조항이다.[5]

결국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능산리고분군 (백제왕릉원 옆)절터. 정비중이다.

 왕릉 모형

 

 

 

 

 

 

 

 백제왕릉은 신라나 조선시대의 왕릉과는 달리 무척이나 규모도 작고 소박하다. 이름조차도 능산리 고분군이었다가 최근에서야 백제왕릉원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1500년전에 멸망한후 이지역에서 한번도 국가의 출현이 없었기에 소외당하고 잊혀진 역사가 되었다가

요즈음 에서야 제대로 조명되기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