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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부여] 백제시대 유물의 총본산, 국립부여박물관 - 실내전시 유물

by 柔淡 2010. 5. 13.

부여는 백제가 위례, 공주를 거쳐 세번째로 천도하여 6대왕 123년을 운영해온 백제의 수도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한 국가의 수도는 경주, 평양, 개성, 서울, 공주, 부여 등인데 북쪽에 있는평양이나

개성은 가볼수 없고 서울, 경주에 비해 너무나도 유적이 남아있지 않고 발굴되지도 않은곳이다.

물론 15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찾기 어려운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부여박물관에 있는 백제대향로나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을 보면 그당시

백제의 문화가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웠는지 짐작이 간다. 

 

부여관광 홈페이지 소개글

부여라 하면 한국민의 80% 이상이 백제의 수도였던 곳임을 알고 있다. 중학교 이상을 졸업한 사람이면 부여는 금강의 하류에 있는

충남의 군 소재지로 알고 있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다. 우리 나라의 250여개가 넘는 시ㆍ군 중 100여 년 이상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전국의 관광객이 부여를 찾아와 낙화암을 보고, 국립부여박물관을 보고 간 사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처럼 잘 알려진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당나라 군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여는 백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명칭이 바뀌지 않은 오랜 군으로서의 역사를 또한 가지고 있다. 신라의 수도 계림은 신라가 멸망한 후 경주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지만

부여의 명칭은 백제시대 이래 그대로 지금까지 군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부여라는 나라는 우리 나라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가장 오래 전에 세워져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이다. 결국 고구려에

통합되어 그 역사를 잃어버린 나라의 하나이다. 이 부여에서 금와왕이 동쪽으로 옮겨와 지금 길림성 연길 지방에 동부여가 되었고,

그 일부가 다시 내려와 졸본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그 지배층 일부가 다시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하였고,

백제는 한강유역의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밀려 공주로 천도하였다. 무령왕이 중흥을 이룩하기 위하여 천도의 계획을 하였고,

그 아들 성왕대에 수도를 부여로 옮겼다

부여는 공주와 함께 백제문화의 흔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좋은 의미에서 부여는 완성된 백제의 문화모습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백제 패망의 아픔도 고스란히 전해 준다. 부여에는 왕궁지와 수많은 불교유적들, 왕릉유적, 그리고 부소산과 궁남지 등

발전했던 백제문화가 밀집되어 있다. 그리하여 부여시대 백제로부터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기들의 문화

원류를 보기 위해 줄을 이어 찾아든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같이 화려한 백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낙화암의 백제여인들이나 황산벌에서 산화한 한 맺힌 백제최후를 지킨

영령들의 숨결도 함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당연합군의 말발굽아래 무참히 도륙 당하고 치욕적인 굴복을 겪어야 했던 백제 최후의

현장인 부여.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바라보며 백제의 애환을 노래한다.

공주로 천도한 뒤 계속 불안했던 백제왕실은 무령왕과 성왕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원상을 회복, 보다 강성한 왕국 건설의 웅지를 가지고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하였다. 부여로 천도한 백제는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호남평야지대의 경제기반과 진취적인 대외 활동을

통해 이 같은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한다. 그리하여 백제역사상 부여시대(538~660년) 123년은 백제문화의 최전성기를 구가하였을 뿐아니라

삼국문화중 최고의 예술혼을 피우게 되었던 곳이다.

또한, 일본고대문화 형성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곳으로 이곳 부여에서는 백제의 역사문화를 찾기 어려워도 일본 지방에서 백제의

아름다운 문화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외 영향력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모든 자료를 보여주는곳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실내전시실은 1, 2, 3전시실과 박만식교수 기증실, 특별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짧은 시간에 다 돌아보기는 어려워 몇가지만 집중적으로 찍었다.

여기서는 플래쉬를 사용하지 않으면 촬영이 가능하다.

 

부여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국보 백제금동대향로. 이건 모조품이다.

진품은 유리상자안에 들어 있어서 제대로 찍기 어렵다. 

 

 

 

  

 제1전시실

전시실 입구에는 당시의 마을 모습과 집의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부여 송국리 유적의 자연환경과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청동기시대의 마을과 집의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반달돌칼·간돌검 등의 석기, 송국리형토기ㆍ붉은간토기 등의 토기, 한국식동검ㆍ동경ㆍ동과

등의 각종 청동기를 전시하고 있으며 도가니, 거푸집 등의 모형을 진열하여 청동기의 제작방법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초기철기시대, 원삼국시대 그리고 부여 논치 제사유적 출토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밖에도 연표를 통해 구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의 한국ㆍ중국ㆍ일본의 역사를 비교하여 살펴볼수 있도록 하였다. 

 제2전시실

먼저 사비시대 전야 충남지역의 모습과 칠지도로 대변되는 근초고왕대 백제의 성장을 들려준다. 이어 부여 중심의 백제유적 영상물과

연표를 통해 사비시대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기획도시, 국제도시로서의 왕도 사비와 행정을 표석과 목간, 벼루를 통해 살펴본다.

이어 의식주 등 생활유물을 통해 백제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주거, 음식, 잡용과 토기, 복식과 장신구를 통해 훑어본다.

다음에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와 국보 제288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을 통해 성왕 및 위덕왕대 정치와 문화를 짐작한다.

이어 익산 왕궁리 기와와 공방유물을 통해 무왕대 정치를 이해하고, 무기와 전쟁을 통해 격렬했던 삼국시대 백제의 전쟁을 이해한다.

마지막으로 사택지적비를 통해 말기 의자왕대 귀족의 문화를 엿본다.

 

칠지도 (최인호시의 역사소설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칠지도는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칼이다. 칼 양면에 새겨진 글자 내용으로 보아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에 백제 왕실에서 제작하여 왜(倭)

왕실에 준 것이다. 이 무렵 백제는 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두고 고구려와 경쟁하면서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칠지도를 통해 이 시기 백제가 중국 동진 및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제철기술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랑이 모양의 토기로 일명 호자라고도 한다.
오른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고 주입구 위는 귀엽게 눈과 코를 묘사하여 자연스럽게 주입구를 입으로 처리하였다.
왕실 귀족의 생활 용품으로 보인다. 해설사는 남자용 소변기라고 설명한다.

 

 

 

 

 

 백제금동대향로 진품. 국보287호다.

 

 귀족사택지적의 비석

사택지적비는 부여 부소산 남쪽에서 발견된 백제 대신 사택지적의 비석으로,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비석의 왼쪽은 깨진

상태이며, 오른쪽 윗부분에는 원 안에 새(봉황 또는 삼족오)무늬를 새긴 후 붉은 칠을 하였고, 앞면에는 글이있다. 갑인년은 의자왕

14년(654)이며, 내지성은 부여 시가지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은산면 내지리이다.

사택지적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좌평을 지낸 인물로 외교 분야에서도 활약하다가 물러났다. 비석에 새긴 글은 중국 육조

시대의 사륙병려체를 사용하여 당탑(부처님을 모시는 금당과 탑)은 세운 동기와 인생의 무상함을 시처럼 표현하였다.

 이를 통해 백제말기 귀족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보물급 유물들이 많았는데 시간상 주마간산식으로 스쳐 지나왔다.

다음에 별도로 시간을 내어 하나씩 자세하게 살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