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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서산] 몽유도원도를 그린 조선최고의 화가를 모신 안견기념관

by 柔淡 2010. 5. 28.

서산시내 대도관에서 아침을 먹고 대산의 삼길포로 달려가 두시간정도 삼길포 전망대를 오르내린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 이자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 기념관이다.

 

서산 출신인 현동자 안견은 조선 초기 산수화 풍을 창출한 한국화의 대가로 신라의 솔거, 고려시대 이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화가로

손꼽힌다. 현존하는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은 조선 초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곽희파 서풍을 바탕으로 안평대군의 부탁을 받고 단 3일만에 그린

몽유도원도이다. 광해군 11년에 기록한 서산의 지방지 호산록에 안견의 출신지가 서산시 지곡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서산 문화의 뿌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서산시는 4천7백만원을 들여 안견의 출신지인 지곡면에 몽유도원도를 실측크기로 조각한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어 한국화인 창출자인 안견의 자연애호사상을 현창하고 미술 학도의 정신적 지주로 승화시킴은 물론 국민 정서 순화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키

위해 91년 10월 기념관도 건립했다. 기념관은 사업비 2억2천여 만원을 들여 지곡면 화천리 대지 4백 평에 한 양식 충형 건물(건평 80평)로 세웠는데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견의 유작품인 적벽도 소상팔경도 사시팔경도 등 모사품 18점이 전시되어 있다.  

 

안견기념관 전경 

 입구의 기념비앞에 봄구슬봉이가 피어 있는데

 

 그중 분홍색 봄구슬봉이는 보기 드문것이다.

 

 기념관 입구

 기념관에서 내려다본 지곡면 일대. 봄빛이 너무 아름답다.

 

 기념관 내부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세종 29년(1447)에 어떤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여행하고 거기서 본 바를 안견에게 설명해 주어 3일만에 완성된 그림인데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최고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몽유도원도에서 두드러지는 독창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일반적인 두루마리 그림과는 반대로 그림의 왼쪽으로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는 독특한 화면구성을 들 수 있는데 화면의 좌측 아래쪽에서 우측 위로 대각선을 따라 현실세계와 꿈속의 세계를 효율적이고도 치밀하게 배치하였다.
또한 평원과 고원의 대조를 통해 산세의 웅장함과 환상적인 느낌을 더욱 고조시키고 넓게 펼쳐진 도원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부분과는 달리 이곳만

조감도법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세부표현도 매우 뛰어나 선묘는 세밀하여 일획의 실수도 없이 정갈하며 박락되어 흔적만 살펴볼 수 있는 복사꽃

꽃술의 금채를 제외하고는 정교하게 채색된 부분 역시 아직도 화려함과 영롱함을잃지 않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 구석에 지곡가도(池谷可度)라는 안견의 관지(款識)가 있고 이어서 주문방인(朱文方印) ‘가도(可度)’가 찍혀있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상하 2개의 두루마리로 표구되어 있는데 상권의 첫 머리에 몽유도원도라는 안평대군의 제첨과 몽유도원도가 완성된지 3년 후에

지은 안평대군의 칠언절구가 주서로 쓰여있으며 이 시문에 이어서 몽유도원의세계가 펼쳐져 있다.
이 그림 뒤에 안평대군의 발문이 붙어 있으며 그 뒤를 이어 세종조의 대표적 인물 21명의 찬시가 실려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몽유도원도 진본은 일본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의 스타는 뭐니 뭐니 해도 `몽유도원도`였다. 겨우 9일 동안 전시된

작품을 보기 위해 수십만의 관람객이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 현재 일본 덴리대가 소장 중인 이 그림을 한국이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1946년 김재원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일본에서

떠돌아다니던 몽유도원도를 사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던 것. 하지만 우리나라엔 구입할 만한 돈이 없었고, 소유권은 덴리대로 넘어갔다.

한국 미술사에선 `가장 안타까웠던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안견의 1447년작 몽유도원도는 조선전기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안견이 안평대군에게 꿈에서 봤다는 도원 이야기를 듣고 사흘 만에

완성한 그림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회화 가운데 제작 연대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그림의 가치는 단순히 회화로서만 따질 수 없다. 안평대군, 김종서,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등 당시 조선 명사들의 글씨가 함께

담겨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15세기 조선의 예술과 사상이 동시에 결집된 정수라 할 수 있다. 이런 가치를

인정해 일본에서도 몽유도원도를 국보로 지정하고 있다.

몽유도원도가 처음 일본에서 발견된 것은 1893년의 일이다. 가고시마의 시마스 히사시루시이라는 사람이 최초의 일본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 이전에 일본으로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오랜 옛날부터 규슈에서 전해 내려왔다는 얘기가 전해져 임진왜란 때

건너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몽유도원도를 돌려받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불법 반출됐다는 증거가 현재로선 없기 때문이다.

그림에 몰리는 우리의 관심을 알기 때문인지 덴리대가 여간해선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도 문제다.
한 역사학자는 "몽유도원도의 반환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긴 하지만, 일단 우리 학계가 연구라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급하다"고 말했다.

안견의 일화를 적어놓은 용재총화

안견은 자(字)를 가도(可度), 득수(得守)라 하고 호(號)를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라 하였으며 정확한 생존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에 의하면 세종년간(1419-1450)에 가장 활발히 활동하였고, 성종년간(1469-1494) 초까지도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그릴 당시 이미 정4품의 호군(護軍)벼슬을 하였는데 6품이 한계였던 화원의 신분으로 정4품까지 올라간 것은 매우 파격적인

경우로써 조선 건국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후대의 화가나 화론가들이 그를 찬탄하는 글을 남기고 있는데 성현은‘용재총화’에서 “안견은 천성이 총민 한데다 고래의 명적을 많이 보고 연구하여

그 요체를 터득하고 고금 명가들의 장점을 모두 규합 절충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였으며, 그의 산수화는 특히 빼어났다”고 적고 있다.


안견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았고 안평대군의 소장품중에 많은 수를 차지한 북송대 곽희의 화풍을 토대로 여러 화풍을 소화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양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산수화에 가장 특출하였으며 그밖에도 초상, 화훼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그러나 기록과는 달리 실제로 남아있는 작품은 ‘몽유도원도’ 한 점 밖에 없다. 그 외에 ‘사시팔경도’ ‘소상팔경도’ ‘적벽도’등이 그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들 작품을 통해서 그의 화풍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호산록, 여기에 안견이 서산 지곡출신이라는 말이 적혀있다.

 죽계사적

 조선왕조 실록

 

 소상팔경도

 

 

 

 

 

 

 

 

사시팔경도 

 

 

 

 

 

 

 

 

 

 어서 빨리 일본 천리대에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찾아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