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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부여]백제시대 석조유물의 보고, 국립부여박물관 야외전시장

by 柔淡 2010. 7. 8.

부여 팸투어 둘째날, 하룻밤을 묵은 부여 청소년 수련원에서 아침을 먹고 궁남지를 돌아본후 부소산성에 오르기전

국립부여박물관에 들렸다. 지난번에는 내부 유무물을 자세히 살펴보느라 야외전시 유물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해서

이번에는 야외전시유물만 중점적으로 살펴 보았다.

 

박물관입구 전경 

 석조

 

 

동사리석탑. 출토지 - 부여 세도면 동사리(扶餘 世道面 東寺里)

원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석탑이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네면에는 각면마다 3개의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위층 기단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네 모퉁이마다 돌출된 꽃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는데, 2층 몸돌부터는 심하게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 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지금의 장식은 훗날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석탑양식이다.

 

 

 박물관석조여래입상. 출토지 - 부여 동남리 전 천왕사지 부근(扶餘 錦城山 傳 天王寺址 附近)

1933년에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전천왕사지(傳天王寺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몸체에 비하여 머리가 크며 어깨와 하체가 거의 일직선으로

곧바로 서 있는 자세이다. 얼굴은 살이 올라 풍만하며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아무런 무늬없이 발 밑까지 내려져 있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이 불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 있어 균형미가 부자연스럽다. 충청도 일원에서 유행했던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성주사지출토 비머리

출토지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터 (忠南 保寧 聖住面 聖住里 聖住寺址)

이수(?首)는 이무기를 새긴 비석(碑石)의 머릿돌을 가리킨다. 이수는 일찍이 중국 한(漢)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당(唐)나라에 이르러

절정기를 이룬다. 이 성주사터 발견 비머리는 전체모양이 훈형(暈形)으로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석비(石碑)를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중앙 상단부에는 원형으로 된 제액(題額)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각이 섬세한 작품이다.

 

 성주사지출토비석받침

출토지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터 (忠南 保寧 聖住面 聖住里 聖住寺址)

비석받침[龜趺]은 거북모양의 돌비석 받침돌을 가리킨다. 거북의 잔등에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 일은 중국

당(唐)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그 뒤 전시대를 통하여 성행하였다.
이 비석받침은 머리와 몸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다리와 거북의 등모양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수법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상부에는 비신을 꽂을 수 있는 비좌가 마련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비석받침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