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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부여]우리나라 고대축성기술의 전시장, 부소산성

by 柔淡 2010. 7. 8.

15년전 계룡대에 살때도 부여는 자주 지나 다녔지만 아이들도 어리고 그때는 걷는것도 싫어해서 부소산성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었다.

이번 팸투어에 부소산성 탐방계획이 있길래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나와 부소산성으로 갔는데 장마철이라 기온도 높고 습도도 높아 한시간 반동안 많은 땀을 흘렸다.

 

부소산성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북동쪽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동반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사방의 문지(門址), 군창지

(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 도성의 일환이며,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의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 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대대적인

개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부의 성벽은 통일 신라 시기에 수축되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고을의 규모에 맞도록 축소되어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성내 벽쪽에 호(壕)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성벽의 축조에 판축의 재료로 이용하였다.

바깥 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성벽의 안쪽과 중간에도 기둥을 세워 분할 축조되었다. 기단에는 낮게 석축을 하거나, 기단 석렬을

마련하고, 안쪽으로 배수로 겸 통행이 가능한 좁은 부석(敷石)의 시설도 있다. 성벽에는 가로 세로로 목재를 넣은 것도 있다. 후대의 것은 무너진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기도 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版築)하듯이 황색 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 놓았다.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수축, 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것이긴 하나, 년차적인 조사에 의하여 성벽과 치성 및 특수한 시설과 내부의

여러 가지 양상이 차례로 밝혀져, 우리나라 고대 축성 기술의 박람회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를 중심하여 조사된 구간에서는 다양한 집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성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北門)과 수구(水口)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소산성 입구. 천천히 걸으면 한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신궁을 부소산에 짓기위해 파놓았다는 땅굴.

부소산에 신궁을 짓는다는것을 감추기 위해 이 당굴로 건축자재를 운반했다고 하는데 일본이 패망함으로해서 결국은 수포로 돌아갔다.

경술국치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 아직도 일제의 잔재는 여기저기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  

 백제의 세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신 3충사 입구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 ?∼656), 흥수((興首), ?∼?), 계백((階伯), ?∼660)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祠堂)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 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성충

 흥수

 계백

 

 

 3충사 오른쪽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노랑어리연과 수련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단풍나무 숲길이 시원하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멋진길이 될것 같다.

 1400여년을 면면히 이어내려온 퇴메식 산성

 영일루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

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군창지

 부소산성 내의 동남부 가장 높은 위치에 해당되는 곳에 있는 이 군창지(軍倉址)는 1915년 이곳 지하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시대

군량(軍糧)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쳐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함으로써 건물터의

규모가 상세히 밝혀졌다.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는데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와 대대적으로

건물을 다시 세웠음이 밝혀졌다. 이것은 백제시대부터 자리잡은 군창지를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산성의 흔적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수혈주거지

 

 

 반월루. 1972년에 신축되어 특별히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부소산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곳이다.

 

 역시 일본인들이 구축했다는 부여의 간선도로, 주작대로

 

 반월루에서 내려와 사자루로 간다.

 사자루.

사자루는 부소산 서쪽 봉우리 정상, 곧 달을 보내서 ‘송월대(送月臺)’라 불리는 봉우리에 있다. 이곳은 해발 106m로 부소산에서는 가장 높아서

동으로는 계룡산, 서로는 구룡평야, 남으로는 성흥산성, 북으로 울성산성과 증산성 등이 보여 전망이 아주 좋다. 아마 백제 시대에는 망루가

있어서 부소산성의 서쪽 장대 구실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자루는 1919년 당시 부여군수인 김창수가 주도하여 임천 문루인 배산루(背山樓)를

옮겨 지었고, 1990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땅을 고르다가 금동불(일명 정지원명 금동불)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자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의 건물로 1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웠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익공 계열로 익공과 익공 사이에 화반

대공을 설치하였다.
한편, ‘사자루(泗沘樓)’ 편액은 기미년(1919) 5월에 고종의 아들인 의왕(義王) 이강(李堈)공이 썼고, ‘백마장강(白馬長江)’ 편액은 조선 말기 명필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썼다.

참고로 사자루가 사비루로 불리었던 이유는 현판의 글씨중 ‘泗沘樓’를 ‘泗비樓’로 잘못 읽은데서 비롯됐다.
이런 혼동의 시초는 『삼국유사』에 부여를 ‘泗沘’, ‘泗’라 혼용된 데서 비롯되어 현재까지 이어진 듯하다. 그런데 泗沘는 배’로 해석되는데,

泗는 新·東·赤의 의미로 ‘所’와 같고 沘는 伐·佛·火·夫里와 같이 ‘넓은 들판’이나 ‘마을’을 의미하니, 결국 부여의 별칭인 ‘所夫里’와 같은 뜻이다.
그래서 2002년 1월 3일 문화재자료 명칭변경이 받아들여저 ‘사비루(泗沘樓)’를 ‘사자루(泗樓)’로 명칭변경하고, 사자루 현판을 교체하였다.

  

 멀리 백마강에 황포돛배가 보인다.

 

 사자루에서 낙화암으로 내려가는길